근대는 한 사람이 문연게 아니라
당시엔 이미 그런 요소들이 형성
그럼에도 종교만 중세틀에 갇혀
개인 구원이란 중세적 주제로
그는 종교 틀을 개혁했을 뿐인데
비로소 사회 전반에 근대가 도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생각이 지배해왔다.
“젊은 헤라클레스가 망치와 못을 움켜쥔다. 그는 몇 번의 망치질로 한 교회의 문에 논제들이 적힌 큰 종이판을 단단히 박는다. 그리고는 인류를 근대의 개인적 신앙으로 이끄는 해방자가 된다.” (Die ZEIT Geschichte, 2016/5, 67쪽).
그러니까 루터의 망치질이 굳게 잠긴 근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것이다. 상징과 비약이 허용되는 문학과 예술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실증적 경험과학인 사회학은-이 못질이 근대에 대해 가지는 중차대한 의미를 인정하면서도-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사회학자의 눈에 근대는 한 인간이나 한 집단, 한 사건에 의해 한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개인들, 집단들 그리고 수많은 물리적-정신적 요소들이 장기간에 걸쳐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그 이전의 고대도 중세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루터는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생각도, 근대라는 관념도 없었다. 그는 전형적인 중세인이었다. 여느 중세인들처럼 그의 최대 관심사는 종교적 구원에 있었다. 그는 이 구원을 전적으로 중세적인 방식으로 추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찾았으며, 그 결과 중세의 스콜라적 가톨릭 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적 사상을 구축했다. 말하자면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렇게 보면 근대적 신학이 루터로부터 발원했다고 할 수 있으며 루터를 개신교 신학의 창시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터가 근대에 대해 갖는 의미는 신학적 영역을 훨씬 넘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철학, 역사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이해서는 지난주에 언급한 종교와 사회의 관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종교가 사회의 끈이었다. 종교적 관심과 문제가 개인과 사회의 모든 것을 각인하고 관통했다. 물론 루터가 이러한 사회학적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복음의 갱신을 통한 개인영혼의 구원, 바로 이것이 그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한 관념이었고 실제로 새로운 종교적 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사회를 하나로 묶는 끈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중세적인, 너무나도 중세적인 인간 루터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끈은 완전히 근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중세보다 근대에 더 가까웠다.
물론 루터가 만든 이 종교적 끈이 근대의 시원이 되면서 근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자본주의, 도시, 시민계층, 화폐경제, 근대적 국가, 개인주의 등을 창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모든 것을 종교로 환원하는 종교적 결정론으로서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하는 경제적 결정론만큼이나 위험한 발상이다. 16세기 초에는 이미 그런 요소들이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여전히 중세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종교와 여타 사회적 영역 사이에 구조적 모순이 존재했던 것이다. 바로 이 구조적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다시 말해 이미 근대적 운동을 시작한 사회적 영역들에게 새로운 종교적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더 나아가 아직 근대적 운동을 시작하지 않은 영역들을 그 조류에 편입되도록 만듦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적 운동이 가능하도록 만든 이가 다름 아닌 루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치 루터의 지휘 하에 중세가 일사분란하게 근대를 향해 진군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루터는 중세를 살짝 건드려서 근대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또 다른 비유를 쓰자면, 루터는 근대적 운동을 ‘킥오프’ 했다. 루터 신학이 근대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해방, 탈주술화(주술로부터의 해방), 세속화, 사회적 분화에서 찾을 수 있다.
루터에 의해 창출된 근대적인 종교적-사회적 끈은 츠빙글리와 칼뱅 등 그를 이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더욱 더 근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따라서 사회를 더욱 더 근대적으로 이끌게 된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면서 늦어도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이 끈은 아예 끊어져 버리며, 따라서 사회의 각 영역이 그리고 개인들이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의 원리와 법칙을 따르게 된다. 보편주의가 특수주의 또는 다원주의로 교체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근대이다.
이처럼 근대는 루터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근대는 루터가 바라던 바도 아니다. 새로운 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합되는 세계, 바로 이것이 저 위대한 개혁가가 진정으로 꿈꾸던 세계였다. 그러나 그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루터에게 종교 그 자체인 기독교는 다양한 교파와 분파로 나누어졌다.
루터는 근대인도 아니었고 근대가 루터로부터 발원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근대의 아버지가 아니다. 근대는 수많은 아버지를 가지며 또한 수많은 어머니를 갖는다. 이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결정적으로 근대를 각인한 이가 바로 루터이다. 그 이유는 중세의 가장 강력한 힘인 종교를 개혁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최초의 근대인이 아니라 마지막 중세인이었다. 이 마지막 중세인은 인간영혼의 구원이라는 중세적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비중세적 답을 얻었다. 그리하여 자신은 중세인이면서 중세를 근대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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