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 파탄 부른
불통ㆍ폐쇄의 구중궁궐
참모도 대통령 잘 못만나
‘오픈 하우스’로 만들어라
대통령-부처 간의 불통 키우는
비대한 수석실도 대폭 감량해야
마이크 필요 없는 구조로 만들어
럭비공처럼 튀는 대화ㆍ논쟁하라
다시 시작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파면한 대한민국은 이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위에 서게 됐다.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현재의 상처와 혼란을 수습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열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안은 것이다. 이 소명의 첫 과제가 박근혜 시대의 파탄을 집약하는 요체인 불통과 폐쇄, 일방통행의 리더십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데 민심의 이견은 없다.
청와대의 블랙리스트 오더에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받아 적기 바빴고 검찰은 정권의 시녀로 심기 경호에 충실했으며 관변 단체들은 기업체의 돈을 뜯거나 관제 시위로 정권을 호위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그 전모의 일단이 드러난 ‘정경유착’ ‘문화계 블랙리스트 통제’ ‘정부 권력기구의 시녀화’ 등의 적폐를 관통하는 핵심에는 대통령과 청와대의 일방통행식 불통의 리더십이 있었다. 정부 내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했고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이는 지난 4년 교수신문이 매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경고했던 바였다. ‘도행역시(倒行逆施ㆍ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ㆍ2013년)’ ‘지록위마(指鹿爲馬ㆍ사슴을 말이라 칭한다ㆍ2014년) 혼용무도(昏庸無道ㆍ세상이 어지럽고 무도하다ㆍ2015년)는 모두 시대 역행적인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었다. 결국 이를 바로 잡지 못한 박근혜 정부는 2016년의 사자성어 ‘군주민수(君舟民水ㆍ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는다)처럼 참담하게 무너졌다.
대한민국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 리더십을 뒷받침한 곳이 왕조시대를 연상케 하는, 밀실과 폐쇄의 청와대였다. 정부 내각은 청와대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청와대 내에서도 참모들은 관저에 박힌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지난해 국회에서 조윤선 전 정무수석조차 대통령과 독대를 한번도 못 했다고 실토해 국민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이란 초대형 참사가 터졌을 때조차 대통령을 직접 만나 보고한 이가 없었다. 언론 역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기간 150여회의 기자회견이 열렸지만, 박 전 대통령의 공식 기자회견은 고작 5번 뿐이었다. 청와대 내에 굳건하게 드리운 이 불통과 폐쇄의 장벽이 바로 비선 최순실씨에겐 제집 드나들 듯 청와대를 오가며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디딤돌이었던 셈이다.
비선의 국정농단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제왕적 리더십 자체를 바꾸기 위해선 무엇보다 청와대의 불통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이번 사태의 핵심 문제가 대통령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대통령의 리더십을 바꾸기 위해서 청와대의 구조와 조직 등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참모들간 심리적 거리를 넓히는 청와대의 폐쇄적인 공간 구조에서부터, 내각의 기능을 압도하며 비대화하는 청와대 조직까지 재점검해 개방적이면서 내실있는 ‘오픈 하우스’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적 밀실 구조의 청와대 공간부터 개혁
청와대의 권위적이고 비밀스런 위상은 청와대 건물 구조에서부터 드러난다. 불필요하게 넓고 길면서 위압적으로 설계돼 불통(不通)과 암통(暗通)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본관, 대통령 생활공간인 관저, 보좌ㆍ비서진이 근무하는 비서동(위민1ㆍ2ㆍ3관), 취재진이 상주하는 춘추관 등이 모두 떨어져 있다. 본관과 비서동 직선거리는 500m로 초소 2곳을 지나면 15분 걸린다. 차로는 둘러가야 해 5분 소요된다. 관저에서 비서동 직선거리는 600m. 지난해 국회 최순실 청문회에서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세월호 7시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며 대통령 서면보고서를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가서 전달하곤 했다"고 밝혀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긴 동선을 탓하며 관내에 전기자전거 수십 대를 배치했을 정도다.
본관 대통령 집무실의 경우 출입문에서 책상까지 거리가 15m나 된다. 이 전 대통령은 "테니스를 쳐도 되겠다"며 휑한 집무실을 둘러봤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본관건물에 압도당해 "기수(김기수 수행실장)야, 사무실에 우째 가노?"라고 물었다고 한다. 15m를 걸어가는 동안 직언하려던 마음이 바뀌더라는 수석비서관들부터, 엉덩이를 보이지 않으려 뒷걸음질로 나오다 넘어진 장관들의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본관 전체 면적은 25평대 주거공간의 1,000배인 8,476㎡(약 2,564평).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을 마주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청와대 출신 인사들과 전문가들은 청와대를 권력의 정점으로 세우려는 권위적 상징성을 버리고 대통령과 참모진 간의 '불통의 거리'를 좁혀 실무형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제언한다. 사실상 고립돼 일할 수밖에 없는 본관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동으로 옮겨 수시로 회의가 가능토록 하거나 청와대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해 국무총리ㆍ각부 장관과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이명박정부의 김효재 전 정무수석은 "대부분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빠르고 편한 소통을 위해 대통령, 총리, 수상 등의 집무실과 참모실이 한 데 붙어 있다"며 "마이크가 필요 없는 공간에서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의견이 튀는 대화와 논쟁이 가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대통령이 부르면 들릴 거리에 참모진이 배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공간인 웨스트윙에는 부통령실, 비서실장실, 대변인실, 선임고문실, 국토안보보좌관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다.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에서 뜰인 로즈가든으로 나가면 참모진 모두와 만날 수 있는 개방형 구조다. 영국 총리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는 총리실 건물 주소다. 3층에 총리 관저가 있고 2층에 국무회의장이 있으며 옆 건물인 11번지에 재무장관 집무실이 있다. 두 건물은 연결돼 있다. 일본의 총리 관저에도 관방장관실, 비서관실이 있고 인근에 각 부처가 밀집해 면밀히 소통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내각에 군림하는 비대한 청와대 조직도 슬림화
청와대 조직이 각 정부 부처에 대응해 수석비서관실을 두고 갈수록 비대해지는 것도 청와대의 일방통행식 운영을 뒷받침하는 구조로 지목된다.
청와대의 직제상 정원은 경호인력을 빼면 대통령비서실(443명)과 국가안보실(22명) 합쳐 465명이다. 하지만 각 부처 소속 공무원을 파견 받아 실제 근무 인원은 500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384명), 김영삼(377명) 정부 시절 300명 후반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지속적으로 늘어온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내각과의 조율 내지 조언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 수석실이 상당한 인력을 운영하면서 부처 장관을 지휘, 내각과 대통령간의 불통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가 ‘받아쓰기 내각’이란 조롱을 받은 것도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다 비대한 청와대 조직 문제가 겹쳤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청와대 조직의 비대화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뒷받침하는 핵심적 요소다”며 “청와대 보좌 조직을 대폭 감량해 내각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슬림화한 뒤 일상적 국정운영은 총리실에 맡기고 청와대는 대통령 고유의 어젠더에 집중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 백악관도 모든 부처를 지휘하는 형태가 아니다”며 “한 부처에서 할 수 없는 일이거나 대통령이 집중하고자 하는 의제 중심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ankookilbo.com
서상현기자 ls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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