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7시50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평소 보다 일찍 출근길에 나선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 권한대행에겐 쉴새 없이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이날, 불과 20초도 채 안 되는 그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수많은 국내외 취재진이 이 곳으로 집결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지만 자칫 밋밋할 수도 있었던 이 출근길에서 카메라 기자들은 뜻밖의 수확을 가져갔다. 이 전 재판관이 머리에 미용 도구인 분홍색 헤어롤 2개를 착용한 채 들어섰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할 중요한 선고를 앞둔 시점에 이 전 재판관의 심사 숙고한 흔적이 이례적으로 표출된 이 장면은 해외에서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세월호 참사 당일은 물론, 탄핵 된 이후에도 사저로 전담 미용사를 불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태도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전 권한대행의 헤어롤은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낳고 있다. AP통신 보도처럼 헤어롤은 ‘열심히 일하는 직장 여성’의 분주한 모습도 반영하고 있지만 이 전 권한대행과 같은 성공한 여성들조차 출근 전 반드시 화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장은 여성 직장인의 예의다’
“남성 재판관이었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이 전 재판관의 출근길을 살펴본 회사원 최모(38)씨는 사진 뒤에 숨겨진 장면을 상상하며 씁쓸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중요한 일을 하는 고위공직자 남성들, 특히 탄핵심판 선고와 같은 중요한 날에 출근하는 남성들은 아내가 넥타이를 골라주는 등 ‘내조’를 받았을 것” 이라며 “반면 공직생활을 한지 수 십 년이 됐어도 여전히 스스로 머리를 만지는 이 재판관의 모습은 (우리 같은) 여성 직장인들의 힘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누군가의‘내조’가 없이도 스스로 외모를 꾸미고 출근한다.‘화장은 예의’ 라는 정언명령이 우리나라 여성 직장인들의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기업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예절 강의에 ‘화장을 해야 프로답게 보인다’는 내용이 포함될 정도로 이는 보편화됐다. 2013년 취업 포털 업체인 커리어에서 여성 직장인 42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이상이 출근 시 화장 등 외모관리를 한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체면ㆍ품위 유지’(62.8%)를 위해서였고, 여성들의 아침 화장 시간은 평균 32분에 달했다.
언제부터 화장이 직장 예절이 됐을까. 전문가들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시작된 시점부터 여성의 능력 평가에는 항상 외모가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직장여성에게는 항상 ‘직장인’의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동시에 요구됐다”며 “특히 ‘예쁘고 용모 단정한 젊은 여성’ 이라는 성적 역할을 충족해야 인정받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꾸밀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규직도 알바생도 피해갈 수 없는 이중 잣대
갈수록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화장에 대한 직장 여성들의 부담은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여성의 51.8%가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고, 심지어 대학진학률(74.6%)은 남성(67.3%)을 앞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남성 직장인에게 기대하는 외모 기준이 다르다는 현실은 굳어져 있다.
지난 1월 국내 한 증권사는 사내 게시판에 ‘여직원 정장 드레스 코드(복장 규정)’라는 19개 준수사항을 공지했다. 규정에 따르면 여성 직원들은 반드시 투피스 형태의 정장을 입어야 하고, 3개 이상의 악세서리를 착용해야 하며, 특히 기초화장 및 색조(섀도우, 립스틱, 볼터치)화장까지 꼼꼼하게 하고 출근해야 했다. 회사는 뒤늦게 “권고사항이며 강제성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는 많은 논란이 됐다([단독] 여직원 복장 규정… 아직도 이런 회사가).
아르바이트생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알바노조는 지난해 3월 서울 상암동 CGV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CGV가 여성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용모와 복장 기준을 제시하고 지키지 않을 경우 벌점을 매겼다”고 폭로했다. 이들이 공개한 기준은 ‘붉은색 립스틱 필수, 윤기가 없을 경우 무색 립글로스 덧바름, 생기 있는 피부화장’등을 포함해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박윤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노무사는 “고용관계를 외모나 임금과 관련 짓는 것은 위법이며, 이를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건 성역할 구분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유사한 상황은 해외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1월 육아휴직을 끝낸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복직 첫 날. 뭘 입지?’라는 제목으로 똑 같은 회색 티로 가득한 옷장 사진을 찍어 올렸다. 패션과 같은 ‘하찮은 것’을 결정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의 사진에는 이틀 만에 120만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반면 저커버그보다 3년 먼저 단벌출근을 결정했던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사치앤사치의 뉴욕사무소 아트 디렉터 마틸다 칼은 칭찬은 커녕 ‘종교적 신념이냐?’ ‘기인같다’ 등 정반대의 반응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패션지 하퍼스 바자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매일 같은 옷을 입기로 한 내 결정을 남들로부터 승인 받는 데 남성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저커버그는 되고, 메르켈은 안 되는 ‘단벌패션’의 정치학)
성별 고정관념에 균열 낸 ‘헤어롤’
전문가들은 이제 ‘외모 가꾸기는 필수’란 여성 직장인들에게 덮어 씌워진 고정 관념도 바꿔야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 전 재판관의 모습은 여성 직장인의 삶에 숨겨진 ‘꾸밈 노동’을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고정관념에 균열을 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나영 교수는 “그 동안 우리사회는 외적으로 ‘준비된 여성’만이 업무를 잘 해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전 재판관은 ‘다소 헝클어지고 자연스러운 모습의 여성도 얼마든지 자신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고 지적했다. 이어“이 권한대행이 보여준 여성 노동의 현주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저항할 때 여성 직장인에게 부과되는 이중잣대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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