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안에 아직 9명이 있기를, 아니 그래야 한다. 우리는 싸늘하게 식었을 그들을 따뜻하게 맞을 준비가 돼 있다. “늘 기억하겠다”고 해놓고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았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내 가족은 그래도 곁에 있어서, 각자 욕심에 치여 살았다. 다시 그들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고 기억해본다. 그들이 꾸었을 꿈과 못다한 삶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음악 좋아해 친구와 노래 만들어
▦단원고 남현철(2학년6반)
음악을 좋아했다는 현철군. 현철이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던 친구 고(故) 이다운군의 자작곡 ‘사랑하는 그대여’를 작사했다. ‘사랑하는 그대 오늘 하루도 참 고생했어요. 많이 힘든 그대 안아주고 싶어요’라는 노랫말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가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이 노래는 그룹 포맨의 신용재가 녹음해 공개했다. 기타를 잘 쳤다는 현철이를 위해 아빠 남경원씨는 팽목항에 기타를 가져다 뒀다.
엄마와 여행 즐기던 체대 지망생
▦단원고 박영인(2학년6반)
사춘기를 지나 부모와 서먹했을 법도 한 나이, 둘째 아들 영인군은 주말마다 부모님의 여행길에 따라 나섰다. 그래서 엄마 휴대폰에는 장난기 많은 영인의 사진이 가득하다. 영인이는 체대에 가고 싶어했다. 아들이 사달라는 축구화를 못 사 줬다는 엄마는, 팽목항에 축구화 한 켤레를 가져갔다. 축구화에 ‘사랑하는 내 아들 너를 기다리는 모든 이의 따뜻한 품으로 어서 돌아오렴. 사랑한다’고 적어서.
회계 공무원 꿈꾸던 살가운 딸
▦단원고 조은화(2학년1반)
2016년 2월 엄마는 세월호가 있는 바다를 다녀오면서 그 자리에 있던 따개비를 가져와 은화양 책상에 뒀다. 은화와 가장 가까이 있던 물건이니까. ‘학교 가는 버스에 탔다’ ‘학교 도착했다’ ‘어디를 지나고 있다’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왔던 딸의 마지막 메시지는 ‘배가 45도 기울었어’ 였다. 수학을 유독 좋아했고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던 은화의 꿈은 회계 분야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다.
가정형편에 수학여행 안 가려 했는데…
▦단원고 허다윤(2학년2반)
유치원 교사를 꿈꾸던 다윤양은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집을 부렸다. 딸을 설득한 부모는 이모들 도움을 받아 수학여행비를 쥐어주고, 딸을 세월호에 태웠다. 아버지는 용돈 투정 한번 한 적 없는 딸이 눈에 밟힌다. 딸은 수학여행 가는 날 마음에 든다며 아버지의 검은 모자를 빌려 쓰고 갔다. 아이들과 노는 걸 좋아했다는 다윤이는 물놀이 사고 기억으로 물을 유독 무서워했다.
제자에 구명조끼 벗어주고 “탈출해”
▦단원고 체육교사 고창석(당시 43세)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벗어주며 탈출을 외치던 창석씨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고슴도치 같은 머리스타일 때문에 그는 ‘또치쌤’이라 불렸다. 대학 때 인명구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창석씨는 인명구조자격증이 있고, 수영도 잘했다. 2005년 중학교 교사 땐 휴게실에 불이 나자 학생들을 구하러 뛰어들기도 했다. 참사의 그날, 그는 아내에게 “애들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문자로 작별인사를 갈음했다.
제자 위해 뒷산에 천년초 길러
▦단원고 사회교사 양승진(당시 57세)
매일 아침 부지런히 호루라기를 불던 엄한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졸업생들이 꾸준히 연락하는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위해 학교 뒷산에 천년초를 길렀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배가 가라 앉던 날,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면서 그는 엄하게 “갑판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정 많고 따뜻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승진씨 생일 하루 전날이자 결혼기념일인 23일, 세월호가 다시 떠오르는 걸 봤다.
제주로 이사 가려다 막내딸만 남기고
▦권재근(당시 51세)ㆍ혁규(당시 6세)
재근씨는 감귤농사 짓고 살겠다며 가족과 함께 세월호에 올랐지만 결국 목적지인 ‘따뜻한 제주’에 가지 못했다. 베트남이 고향인 아내 판응옥타인(사망 당시 29ㆍ한국이름 한윤지)씨는 싸늘한 모습으로 먼저 뭍에 올랐지만 재근씨와 아들 혁규군은 아직 바다에 있다. 두 사람을 반길 사람은 ‘최연소 생존자’라는 수식어를 부여 받은 막내딸. 아빠가 목말 태워주는 걸 기다린다는 어린 딸은 이제 초등학생이 됐다.
아들과 함께 사는 소망 뒤로 한 채
▦이영숙(당시 51세)
영숙씨는 제주로 이사 오겠다고 한 외동아들의 짐을 싣고 세월호에 탔다. 일찍 남편을 잃은 후 돈벌이 때문에 아들을 시댁에 맡기고 홀로 제주의 한 호텔 식당에서 일하면서 겨우 터를 잡았다. 영숙씨는 2015년이 되면 다시 아들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아들과 등산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아들은 마음이 아파 엄마와 함께 살기로 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집을 구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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