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
아직 쌀쌀한 기운이 있지만 봄은 봄, 농부가 한 해 농사 채비로 바빠지는 3월이다. 일요일인 12일,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에서 도시형 농부시장 마르쉐@혜화가 열렸다. 농부들이 자신이 키우고 갈무리한 것들을 직접 갖고 나와 파는 마르쉐@(‘마르쉐앳’으로 읽는다)의 올해 첫 장이다.
“잘 지내셨어요? 이게 ‘게걸무’라고, 김장할 때 김치 담가 봄에 먹는 거에요. 아주 단단해서 무르지 않거든요.”
“목포에서 엄마가 이틀 전에 짠 참기름이에요. 까맣지 않고 노르스름하니 맑죠? 깨를 40~50도 저온에서 볶아서 그래요. 고온에서 볶은 것보다 기름 짜면 적게 나오지만 몸에는 훨씬 좋아요.”
“채소를 키워 본 적이 없으시다구요? 그럼 조선대파 씨앗을 드릴 테니 한 번 키워보세요. 별로 어렵지 않을 거에요. 나중에 꼭 씨앗 받아서 이웃과 나누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여기도 북적 저기도 북적, 사고 파는 장면마다 묻고 답하고 인사 나누느라 이야기꽃이 그득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서로 배우고 대화하는 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로 소통하는 즐거운 장으로 소문이 나서 늦게 가면 물건이 다 떨어지고 없다. 이날도 오전 11시 개장해 오후 2시쯤 되자 매대가 헐렁해졌다. 그래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울려 소통하는 재미를 놓치기 싫어서다. 오후 5시 파장할 때까지 농사 이야기, 사는 이야기, 음식 이야기가 환한 웃음과 함께 좌르륵 펼쳐졌다.
마르쉐@는 시장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마르쉐’와 장소 앞에 붙는 영어 전치사 ‘at’(@)을 합친 말. 도시 곳곳 어디서나 열릴 수 있는 농부시장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번엔 혜화동에서 열려서 마르쉐@혜화, 토요일인 25일 성수동의 서울숲 옆 언더스탠드 애비뉴에서 열리는 다음 장은 마르쉐@성수다.
만남과 소통으로 즐거운 도시장터
마르쉐@는 농부를 중심으로 요리사, 수공예가들이 함께하며 서로 받쳐주는 우정과 신뢰의 공동체다. 요리사는 농부와 대화하며 제철음식을 만들고 작물의 맛을 찾아간다. 수공예가들은 음식의 맛과 먹는 즐거움을 살리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고 농부와 협력해 농가 브랜딩도 한다. 현재 참여 농가는 70여 팀, 요리사와 수공예가는 50팀 정도. 매번 50~70팀이 나온다. 정보도 교환하고 판로 확보하고 홍보도 할 수 있어 이래저래 좋다.
물건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파는 장은 아니다. 출점자 대부분이 자급을 위한 소규모 가족농이어서 오종종하니 이것저것 한 웅큼씩 들고 나온다. 양은 많지 않지만 싱싱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감나무 과수원에서 캔 냉이로 만든 차, 외할머니가 농사 지은 곡물로 만든 잼, 아빠가 목장에서 짠 우유로 엄마가 만들고 딸이 파는 치즈, 빵 좋아하는 주부가 집에서 만들어 갖고 나온 빵 등 이 장에 모이는 각종 농산물과 가공품은 하나같이 특별하고 정성스럽다. 유기농 인증을 꼭 따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먹거리를 대하는 살뜰한 마음가짐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뿐 아니라 멀리 지리산 자락이나 제주에서 오는 농부도 있다. 토종벼 70여 종을 재배하는 농부, 밭갈이나 농약 없이 자연의 힘만으로 농사 짓는 농부, 각종 채소와 토마토 150여 종을 키우는 농부, 귀촌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농부,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부, 부모의 뒤를 잇는 청년 농부 등 저마다 다양한 철학과 농법, 이야기를 지닌 농부들이다. 장날이면 농부는 새벽부터 일어나 밭에서 작물을 뽑고, 요리사는 밤새 궁리하고 준비한다.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했다. 먹는 건 그만큼 중요하고 삶의 중심이다. 그러나 도시인들이 대형마트에서 사는 농산물은 얼굴이 없다. 깔끔하게 포장된 농산물의 바코드는 그것을 키운 햇빛과 바람과 비, 농부의 땀을 말해주지 않는다. 재래시장에 가도 농부는 없고 거래만 있다.
마르쉐@는 다르다. 돈과 물건 교환만 있는 여느 시장과 달리 만남과 소통이 있는 장, 먹거리와 농을 중심으로 사람과 관계를 연결하고 보여주는 장이다. 마르쉐@를 기획하고 꾸려온 이보은 대표는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 고마워하며 팔고 사는 장, 거래 자체가 삶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장을 원했다”며 “마르쉐@는 대화하는 농부시장”이라고 설명한다.
마르쉐@는 2012년 시작됐다. 내가 먹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지 알고 먹고 생각하며 먹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장터를 기획했다. 봄부터 준비해서 10월 마로니에공원 예술가의집에서 연 첫 마르쉐 이후 지금까지 마로니에공원ㆍ양재 시민의숲ㆍ명동성당 등에서 60여 차례 열었다. 올해는 매달 두 차례, 둘째 주 일요일 혜화동 마로니에공원과 넷째 주 토요일 성수동 언더스탠드 애비뉴에서 열린다. 한겨울 추위와 여름 무더위를 피해 1, 2월과 8월은 쉰다.
5년이 됐지만 매번 장소 확보가 고민이다. 마로니에공원의 경우 매달 사용 승인을 받아야 한다. 광화문광장 같은 데서 열 수도 있겠지만 안 하는 것은 느긋하게 둘러보며 마음 편히 수다 떨고 어린아이들도 데려와 놀 수 있는 장터를 원해서다. 공원이나 유적지에서 열리는 유럽의 농부시장, 백악관 뒷길 농부시장에서 장 보는 미국 대통령 부인처럼 농부시장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려면 시민 공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마르쉐@는 일회용품이 없다. 단골 손님들은 음식 담을 접시나 음료 컵, 장바구니를 들고 간다. 빌려 쓸 수 있는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식기가 있긴 한데, 많이 헐어서 스테인레스로 바꾸기로 했다.
농부ㆍ요리사ㆍ수공예가 우정의 공동체
마르쉐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생태계 다양성과 농부의 자립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3월 12일 마르쉐@혜화는 ‘이어가는 씨앗장’이라는 이름으로 토종씨앗을 나눴다. 농부도 종묘상에서 씨앗을 사서 농사를 짓는 요즘, 개량종에 밀려 보기 힘들어진 각종 토종씨앗이 한자리에 모였다. 농부가 직접 씨앗을 받아 대물림으로 이어온 것들이다. 작은 씨앗 하나 하나가 품은 긴 세월과 많은 이야기가 장터에서 오갔다.
작년 11월 마르쉐@혜화의 토종장은 토종쌀 10가지로 밥을 지어 500명의 시민에게 맛을 보였다. 밥을 사십 번 지었지만, 밥 냄새를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았을 만큼 다양한 맛과 향에 모두 열광했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 동안 농부들이 키워 온 토종벼는 1,200여 종. 그러나 2016년 기준으로 전국에서 생산된 벼 중에 토종은 5톤, 전체의 0.0001%밖에 안 된다. 30여 종의 꿀을 선보인 작년 ‘꿀장’도 식탁에서 사라진 먹거리의 다양성을 회복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온갖 꽃들이 꿀을 내지만 흔히 시판되는 것은 아카시아꿀, 밤꿀, 잡화꿀밖에 없다.
농부네 작물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레시피로 요리사가 차리는 ‘씨앗밥상’은 마르쉐 농부에겐 긍지이고 요리사에겐 도전이다. 이달에는 ‘땅 파는 까망돼지’를 주제로 경북 봉화의 깊은 산골 농가를 찾아가 진행했다. 바람 잘 통하는 축사에서 쌀겨와 사과 찌꺼기를 발효한 사료와 풀, 짚을 먹여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키운 돼지고기로 요리사가 코스 요리를 선보였다. 마르쉐 손님들이 농가를 찾아가 농부와 대화하는 ‘농가행’도 한다. 텃밭에서 식탁까지 농부와 소비자를 잇는 이런 노력들로 쌓아온 상호 신뢰가 마르쉐의 힘이다.
마르쉐를 지속하기 위해 출점자들은 몇 가지 약속을 지킨다. 판매 수익의 10%는 다음 장을 위한 종잣돈으로 기부하고, 1년에 한 번 이상 마르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다 팔려도 가지 않고 남아 대화를 나눈다. 전체 준비와 진행을 돕는 서포터들, 마르쉐를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 더 든든하다. 그렇게 함께 만들고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더불어 살기를 배운다.
“마르쉐를 열면서 시장은 유기체다, 여기가 학교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학교가 되는 곳이죠.“
이보은 대표가 들려주는 마르쉐의 가치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l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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