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월등한 대학생들
쉬운 초급 강의 선택해
주변 학생들 멘붕 오기도
수도권 사립대 1학년 A씨는 이달 초 중국어 기초 과목 첫 강의에 들어가자마자 좌절감을 맛봤다. 중국에 어학연수, 교환학생을 다녀와 기초 실력을 뛰어넘는 학생들이 강의실에 여럿 앉아 있었기 때문. A씨는 “중국어를 처음 배우는 저로서는 중국어 잘 하는 학생들과 수업을 들으며 좋은 학점 따기는 불가능하죠. 전공 수업이라 수강 신청을 취소할 수도 없어서 '양민학살' 당했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양민학살은 롤플레잉게임에서 월등한 실력을 가진 게이머가 수준 낮은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공격할 때 쓰는 말인데, 대학생들 사이에서 실력이 월등한 학생들이 좋은 학점을 쉽게 따기 위해 쉬운 강의를 들을 때 다른 학생들의 처지를 빗대는 말로 쓰인다. 다른 수도권 사립대 4학년 B씨는 양민학살을 한 적도, 당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외고 나오고 해외에 몇 년 살다 온 학생들이 외국어 기초 과목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아요. 쉽게 학점을 받겠다는 심산이죠. 저도 컴퓨터 활용 능력 1급 자격증을 딴 뒤에 엑셀 기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복습 차원도 아니고 학점 좀 쉽게 확보하려 한 거죠. 이러려고 대학 왔나 싶어 찜찜했지만 학점 낮으면 취업이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꿈도 못 꾸니 어쩔 수 없죠.”
대학이 배움의 장이 못하는 데에는 취업난으로 인해 학점에 목을 매는 과도한 경쟁의 현실도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 스스로 학점 사냥에 몰두해 대학 생활의 폭과 깊이를 제한해 버리고 만다. 지방 사립대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 중인 C씨는 “학교가 좋은 강의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만, 학생들이 학점 잘 주기로 소문난 ‘쁠몰’ ‘꿀강’에는 죽자 살자 달려들고, 학점 짜다는 ‘장미칼’은 피하려 하니 수강 신청 때마다 난리법석”이라고 말했다. 쁠몰은 같은 A 학점이라도 A-보다 A+를 잘 주는 강의를, 장미칼은 주부들 사이에 잘 들기로 소문난 장미칼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깐깐하게 학점을 주는 강의를 말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 D 교수는 “ ‘무엇을 논하시오’ 같은 서술형 시험 문제를 내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는 “답안지에 점수를 준 이유를 적어 학생들에게 돌려줘도 학점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찾아와 항의하는 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객관식이나 단답형 문제만 내게 된다. 학생들의 강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는 이번 학기부터 학생들이 교수를 찾아와 학점에 이의를 제기해도 받아주지 않기로 했다. 학부 관계자는 “학생들이 로스쿨을 지원하려면 4.3 만점에 학점 평균이 최소 4.2를 받아야 한다며 학점이 A-나 B+이 나오면 차라리 재수강이 가능한 C를 달라고까지 한다. 중간고사까지 보고 학점이 안 나올 것 같다 싶으면 수강 신청을 취소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학점을 높이려 한 번 들었던 강의를 계절 학기나 추가 학기에 다시 듣는 ‘재수강’ 학생도 부지기수다. 이런 일이 일반화하다 보니 수강 환경은 더 악화하고, 낭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학문과 지식을 두고 한계에 도전해보려는 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로스쿨과 취업을 위해 좋은 학점을 좀 더 쉽게 얻으려 안전운전만 하려는 모습을 보면 씁쓸하다”고 우려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