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아름다움 ‘라 베리타’
달리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무대
깨알같은 묘사 ‘동물의 사육제’
강아지 털 속 벼룩까지 연기
웃기지 않는 서커스 ‘길 위에서’
현악 연주로 공포ㆍ분노를 표현
화려한 원색의 의상을 입은 단원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유연성을 선보이거나 동물들이 불이 붙은 링을 뛰어 넘는다. ‘서커스’라는 말을 듣는 순간 흔히 떠오르는 장면이다. 하지만 요즘 서커스는 다르다. 무용 연극 영상 미술 등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공연예술로 주목받고 있다. 서커스에 대한 편견을 단숨에 깨트릴 공연들이 올봄 한국을 찾는다.
기묘한 동작보다 시각적 아름다움 강조
세계적인 서커스는 더 이상 얼마나 기묘한 동작을 하는지에 몰두하지 않는다. 기술 위주에서 벗어나 시각적인 아름다움 표현에 집중하는, 이른바 ‘아트서커스’는 새로운 공연 장르로서 서커스를 발전시키고 있다. 내달 27일부터 서울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라 베리타’가 대표적이다.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걸작 ‘광란의 트리스탄’이 경매에 부쳐진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서커스는 애크러배틱과 연극, 춤, 음악, 미술이 결합된 퍼포먼스로 펼쳐진다. 무대에 오른 단원들은 공중제비ㆍ그네ㆍ밧줄타기ㆍ폴 댄스ㆍ저글링 등 익숙한 서커스의 기예를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선보인다. 코뿔소 탈을 쓴 출연자들이 붉은 실타래를 하늘 높이 주고받고, 수채화 같은 조명 아래 무용수들은 밧줄을 타고 날아 오르는 장면은 달리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이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태양의 서커스’에서 연출을 맡았던 세계적인 서커스 연출가 대니얼 핀지 파스카가 달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서커스 작품이다. ‘광란의 트리스탄’은 1940년대 달리가 발레 ‘광란의 트리스탄’의 배경 막으로 그렸던 그림이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2009년 발견돼 경매에 부쳐졌고 당시 익명의 수집가는 본래 목적대로 공연의 배경 막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판단에 핀지 파스카에게 작품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라 베리타’는 201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 20개국에서 3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LG아트센터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이런 작품을 설명할 때 우리가 흔히 아는 서커스와 다르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아트서커스’라는 용어를 쓰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장르를 따로 둔 것이 아니다”며 “이미 서커스는 현대로 넘어오면서 콘셉트를 지닌 이미지와 아름다운 미장센를 강조하는 하나의 예술장르가 됐다”고 설명했다.
음악에서 영감 받고, 메시지 전달하는 다양한 서커스
서커스에 영감을 주는 작품은 미술뿐만 아니다. 호주의 서커스 단체인 서카(Circa)가 2014년 초연한 ‘동물의 사육제’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 생상스가 작곡한 동명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동물의 세계를 표현한 서커스다. 5월 12~21일 열리는 의정부음악극축제에 초청돼 한국 관객을 만난다. 서카는 서커스 단원들은 물론 작ㆍ편곡 담당, 영상, 의상 담당자가 함께 모여 서커스가 할 수 있는 영역을 탐구하고 확장한다.
‘동물의 사육제’에서는 거북이, 코끼리, 백조 등 음악에 등장하는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으로 표현된다. 강아지와 강아지 털 속에 사는 벼룩까지 연기하는 서커스 단원들은 애크러배틱과 같은 고난도 신체 표현을 하며 익살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무엇보다 멀티미디어 활용이 두드러진다. 빗속을 헤매는 장면, 물속을 헤엄치는 장면 등이 환상적인 영상으로 등장해 시각적 상상력을 보완한다. 도시의 장면이 나올 땐 힙합 음악이 삽입되고 연기자들은 직접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오페라와 연극, 서커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연출해 오고 있는 야론 리프쉬츠가 연출을 맡았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을 법하지만 의외로 어른들의 환호가 만만치 않다.
서커스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장르지만 반드시 웃음을 줘야만 할까? 5월 5~7일 열리는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는 ‘왜 웃음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서커스 작품들이 공연된다. 이탈리아 노그래비티포몽스의 ‘길 위에서(TRK#1)’는 간단히 말하면 ‘고공 줄타기’를 하는 서커스다. 하지만 비올라와 첼로, 그리고 기타 연주가 어우러지며 인생의 순간을 표현한다. 축제 관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악기들이 많이 운다.” 현장에서 직접 연주되는 현악기 소리는 줄타기를 희화화된 광대의 몸짓이 아니라 공포ㆍ분노ㆍ고독ㆍ반항으로 보이게 한다.
규칙 없이 움직이는 폴 대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배우가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행할 수 없는 신체극을 표현한 작품 ‘우리끼리’도 주목할 만하다. 벨기에의 젊은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살아 있는 서커스’는 서커스를 통해 ‘상대방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 서커스는?
국립서커스학교가 존재할 정도로 서커스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풍부한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에 비해 국내에서는 서커스가 하나의 공연예술로 발전할 기회가 적었다. 현재까지 활동 중인 유일한 서커스 단체인 동춘서커스단은 곡예와 동물재주부리기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한국인 단원보다 중국인 단원이 더 많다. 그 만큼 서커스를 전문적으로 배운 이들이 적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 공연계를 강타한 서커스 단체를 보며 국내에서도 서커스 전문가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2015년 구의취수장을 리모델링한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서 서커스 장르의 저변 확대를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줄타기ㆍ폴 대 등을 활용한 워크숍이 진행됐고 올해의 주제는 '저글링'이다. 애크러배틱, 마셜아츠,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서커스를 자신의 전공 장르와 접목해 공연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이곳을 찾는다. 서울문화재단 관계자는 “서커스 창작뿐 아니라 관객 저변 확대와 생활체육으로서의 서커스 대중화까지 목표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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