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서울 홍익대 인근 한 카페. 중년의 사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다 ‘연주를 들려달라’는 일행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머쓱해 하던 모습도 잠시. 그는 깜짝 연주로 카페를 순식간에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그걸 어떻게 봤어요?” 최근 서울 종로구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연구실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김광민(57)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KBS 쿨FM(89.1MHz) ‘이현우의 음악앨범’ 녹음을 마친 뒤 MBC ‘수요예술무대’를 함께 했던 PD 등이 모인 친목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는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김광민은 격의 없고 호기심 많은 청년 같다. 연구실 피아노 위에는 모형 드론(무인항공기)이 두 대나 놓여 있었다. 기자가 관심을 보이자 “취미”라며 연구실에서 드론 조종 실력을 자랑하듯 보여줬다. 20여 년 동안 강단에 선 교수의 입 주위에 웃음이 고였다.
김광민은 지난달 6집 ‘유 앤드 아이’를 냈다. 2007년 낸 5집 ‘타임 트래블’ 이후 무려 10년 만에 낸 새 앨범이다. 그는 “게으름을 반성한다”며 웃었다.
새 앨범은 다채롭다. ‘그해 겨울’은 현악 4중주의 선율이 실려 깊이를 더했고, ‘펜과 벨’은 재즈풍의 자유로운 피아노 연주가 흥겹다. 김광민 특유의 동심도 담겼다,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린 ‘학교 가는 길’(2007)에 이어 6집에는 김광민이 고2 때 작곡한 기타 연주 곡 ‘여름 방학’이 실려 추억을 돋운다.
눈에 띄는 건 ‘염원’ 시리즈다. 세월호의 상처를 보듬는 듯한 이미지와 소리가 뭉클하다. 타이틀곡인 ‘염원 파트1’의 뮤직비디오에는 수많은 촛불이 하늘로 솟아 오르고, ‘염원 파트2’에선 관악기인 혼의 연주가 슬픔을 머금은 뱃고동 소리처럼 들려 애틋하다. 김광민은 “‘염원’ 시리즈는 내가 어둠 속에서 어떤 문을 연 뒤 빛이 쏟아져 눈물을 주르륵 흘렸던 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라고 말했다.
분열된 시국은 그의 창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광민은 “이상하게 합창곡 악상이 떠오른다”며 인터뷰 도중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김광민이 합창곡을 만든 건 처음이다. 합창곡을 다음 앨범에 실을 예정이라는 김광민은 “‘애국심’이란 곡도 만들었다”며 다시 한번 연주를 이어갔다. 10년 동안 한 장의 앨범 밖에 내지 않은 만큼, 그의 노트엔 미발표곡이 수두룩하다. 김광민은 “앞으로 1년에 한 장씩은 앨범을 낼 계획”이다. 새 앨범 제목도 ‘스페이스’로 지어뒀다.
김광민은 국내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아노 연주자다. 가수 김민기 양희은 조동진 등의 앨범 연주를 비롯해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건반 주자로 활동했다.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30년이 된 가수 유재하를 데뷔 전 음반제작사 서울음반에 소개시켜 준 이도 그였다. 김광민은 1980년 대학 재학 시절에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동서남북에서 활동한 이력도 있다. “그때는 건반 연주자가 귀했어요. 다들 밴드 음악하고 싶어해 기타연주자만 많았으니까.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걸 지인들이 아니까 건반 좀 연주해달라는 부탁이 정말 많았죠.”
후덕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섬세했다. 김광민은 6집을 준비할 때 자신에 맞는 피아노 소리를 찾기 위해 네 곳이 넘는 녹음실을 돌아다닌 후 다섯 번째로 찾아간 녹음실에서야 녹음을 시작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장난감 조립은 그의 특기. 김광민의 연구실에는 자동차와 탱크 모형의 장난감이 서랍장에 여럿 놓여 있었다. 어릴 적 그의 꿈이 “프라모델(조립식 플라스틱 모형)디자이너”였다고 한다.
20여 년을 홀로 살았다. 외로움에 익숙할 법도 한데, 그는 아직도 불을 켜고 잔다. 다만, 요리는 ‘선수’다. 지인이 집에 찾아오면 파스타를 비롯해 생선 요리도 거뜬히 차려 낸다. 삶의 지론은 “순간을 믿고 즐기자”다. 이날 강의가 없다는 김광민이 인터뷰를 끝낸 뒤 유쾌한 제의를 했다. “술 한잔할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