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쟤 왜 저래?”
누군가가 못마땅할 때 쓰는 표현을 배우 박병은(40)은 늘 자신에게 한다. 15년 전 충무로에 입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볼 때마다 만족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제는 아예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못 보겠단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원라인’라고 다를까. 그는 대출 사기를 소재로 이번 영화에서 행동파 사기꾼 박 실장으로 등장해 섬뜩한 연기로 스크린을 장악하지만, 스스로에겐 역시나 “쟤 왜 저래”감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박병은의 모습이 섬뜩하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박병은을 만났다.
그만의 ‘필살기’ 연기노트
영화 ‘암살’(2015)은 박병은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극 중 미치코(전지현)의 악질 일본인 남편 가와구치를 연기했다. “부모님도 어디 가서 아들이 뭐 하는 놈인지 설명하기 쉬웠을” 영화의 역할이었다. ‘색즉시공’(2002)에서 상욱(정민) 친구 2역이나 ‘오로라 공주’(2005) 속 자동차매장 손님 2역 등 단역으로 잠깐 얼굴을 비쳤던 때를 떠올리면 눈부신 발전이다. 게다가 1,000만 관객이 ‘암살’을 봤으니 무명의 설움이 단번에 날아갔다. 매니저 한 명 없이 다니다 데뷔 10년 만에 지금 소속사(씨제스 엔터테인먼트)를 만난 것도 ‘암살’ 덕분이다.
누가 뭐래도 가와구치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렸다. 특히 나오는 장면마다 비스듬히 앉아서는 핸드크림을 바르는 모습이 유독 강렬했다. 대본에 있던 설정이었을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언젠가 ‘필살기’로 꼭 써먹어야겠다”며 10년 간 품에 지니고 다닌 연기노트에서 따왔단다. 남자들이 잘 바르지 않는 핸드크림은 자기애를 드러내는 가와구치를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사용됐다. 그는 “사람을 많이 죽인 인물이 자신의 손은 굉장히 아낀다는 설정은 무언가 서늘한 느낌을 준다”며 “군인이라는 지위와도 어울리지 않는 이중적 모습을 최동훈 감독님을 설득해 넣은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부모님도 모른다”는 그의 연기 노트에는 ‘필살기’가 가득하다. 잠을 잘 때나 술을 먹다가도 생각난 것을 틈틈이 꺼내 적는다고. 그는 “어제도 새벽 3시께 일어나 뭘 하나 적고 잤다”고 했다.
‘원라인’에서는 아쉽게도 가장 아껴두었던 필살기를 접어두어야만 했다. 대출 사기를 벌여 100억원을 끌어 모은 박 실장이 은행 지점장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 와인병을 깨트리는 장면이 있다. 그는 와인잔을 “잘근잘근 씹어먹는” 행동을 양경모 감독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양 감독은 “감정이 과잉 돼 보인다”고 반대했다. 박병은은 오래 전 술자리에서 아버지 얘기를 하다 술잔을 깨물어 씹던 ‘아는 형’의 모습을 보고 노트에 적어둔 메모를 활용하려 했었다.
오디션의 ‘달인’
“예술고 한번 시험 봐라.” 중학교 때 선생님이 권했을 뿐이었다. 배우의 ‘배’자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단다. 팬레터를 받을 정도였다고. “얼굴은 하얗고 금테안경을 쓴 곱상한 외모”가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나 보다. 여학생 반이 시끄러울 때면 선생님이 “박병은 나와!”라며 부르곤 했다. “제가 가면 금세 조용해졌다니까요. 하하” 그렇게 안양예고에 입학한 뒤에야 배우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 중앙대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백수로 보냈다. 부모님의 지원도 대학 등록금까지였다.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낚싯대나 야구글로브, 운동화 등을 팔며 생활비를 벌었다. 일을 해야 했다. 15년 ‘오디션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의 남다른 ‘오디션 인생’의 절정은 ‘암살’ 캐스팅 때다. 4차 오디션까지 봤다. 3차 오디션에선 가와구치의 인생, 성격, 환경을 담은 리포트까지 작성해 최 감독에게 제출했다. 4차에는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 서울 사당동 한 의상실에서 일본군복을 비싸게 빌렸다. 지금은 제약회사에 다니는 고교 동창을 불러 경기 고양의 일본풍 가옥을 찾아 다니며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저녁에는 일본식 술집에서 군복 입고 사진을 촬영했다. 그 사진들을 들고 마지막 오디션에 갔고 가와구치 역할을 따냈다. 악역이었지만 인물의 실제에 접근하려 했던 게 주효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도 오디션으로 정신병원 의사 역을 맡게 됐다. 정형화된 의사 이미지를 버리고 오디션에 임했다. 그는 박 감독에게 “왜 나를 뽑으셨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가 아니라 환자 같아서”라는 박 감독의 대답에 기분이 좋았다고. 박병은은 “연기의 출발점을 다른 관점에서 시작하는 게 내 모토”라며 “연기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캐릭터에 접근한다”고 했다.
영화 ‘사냥’ 때도 그의 아이디어는 빛났다. 그는 산에서 발견된 금맥을 부당하게 차지하려는 엽사 무리 중 한 명인 곽종필로 나왔다. 총을 들고 산 속을 뛰어다니는 연기를 해야 했다. 숨막히게 사실적인 연기가 필요했다. 일단 메이크업을 지웠다. 사채업자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려고 번들번들한 얼굴을 떠올렸다. 수분크림을 잔뜩 발랐다. “날 것 느낌을 살리기”위한 나름의 ‘작전’이었다. 작은 디테일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작용했다.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보며 자신만의 연기 비결을 터득했다.
“캐릭터 하나를 만드는 데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엄습해 오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이제야 진짜로 배우인생의 시작인 듯합니다. 아직 못 보여드린 게 너무 많으니까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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