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양경석(가명∙30)씨의 상사는 ‘군기 종합세트’로 유명하다. 모든 말에 ‘다나까’를 붙이게 하거나 압존법 강요는 기본, 후배 직원이 자기보다 일찍 퇴근하기라도 하면 다음 날 업무 폭탄을 떠넘기기 일쑤다. 상사는 본인의 취미 생활도 함께하자고 강요한다. 한번은 주말에 함께 캠핑 가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사회생활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다. 끝없는 상사의 횡포에 지쳐 이직을 준비중인 양씨는 “퇴사 할 때 무슨 말을 할지 대본 짜는 맛에 산다”고 토로했다.
직장인들이 ‘사내군기’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취업포털 사이트 사람인이 ‘직장생활 중 갑질’을 주제로 지난해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89.1%가 갑질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갑질한 사람이 ‘내부인사’라는 답변은 71%로 외부인사(29%)의 두 배를 넘는다. 갑질한 10명 중 7명이 회사 사람이란 소리다.
잡무 셔틀부터 옷 지적까지 “똥군기에 한계란 없어”
잡무 떠넘기기는 직장 내 군기잡기의 단골손님이다. 해외영업 사원이었던 주지인(가명∙26)씨는 전 직장에서의 자신을 ‘잡무 셔틀’이라고 묘사한다. 영업 오더가 들어오면 회사 시스템에 계약서에 대한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데 대리, 과장급이 이 일을 막내 사원들에게 전가했던 것. 조씨는 “본인이 따온 사업은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의 흐름과 관련 없는 내가 아등바등 그 일을 하다 보니 야근 하는 날이 많았다”고 말했다.
옷차림이나 태도도 ‘바로잡기’ 대상이다. 자동차 부품업체에 근무하는 백시현(28)씨는 가끔 회사가 군대인지 헷갈린다. 본부장이 남자 신입들을 불러서 줄 세워놓고 가장 머리가 짧은 사람을 지목해 “얘처럼 이발하라”고 시킨 적도 있다. 백씨는 “여직원한텐 매니큐어, 귀걸이 못하게 하는 사업장도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은행에서 인턴을 했던 김초록(가명∙24)씨는 눈 앞에서 똥군기를 목격한 적이 있다. 과장이 평소 좋아하지 않던 대리를 불러 세워 “허리 90도로 숙여서 인사 다시 하라”고 했다는 것. 김씨는 “굳이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의미심장했다. 군기가 이렇게 사람을 복종하게 만드나 싶었다”고 밝혔다.
회식이나 워크숍에서도 군기 잡기는 계속된다. 주씨의 전 직장에선 막내 직원이 술자리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게 전통이다. 거절하면 욕이나 폭언을 피할 수 없다. 학교 교직원 강아진(가명∙27)씨는 워크숍 때 선보일 장기자랑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퇴근 후 한달 동안 동기들과 연습을 했었다. 강씨는 “회사까지 와서 뭐 이런걸 해야 하나 싶었지만 거절했다가 사회성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힐 까봐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 잡은 군대문화를 직장 내 군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전우영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권력을 기반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군대문화가 보편적인 조직생활의 틀로 작용하고 있다”며 “군대를 다녀온 학생이 군기를 도구로 단체생활을 하고 그 영향을 받은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군기를 전파시키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위로부터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전 교수는 “단체 생활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치를 창출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리더라면 맹목적인 복종자 보단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줄 아는 직원이 더 큰 이득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진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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