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관 10여명 생업 뒤로한 채 모임 이어가
“2기 특조위 밑바닥서 시작 않게 경험 전수”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은 ○○○이며 책임소재는 ○○○에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짧은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세월호 인양까지 1,089일이 지나는 동안 원인규명을 위한 선체조사 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다. 특조위는 진상조사를 위해 구성된 유일한 조직이었으나 인양된 세월호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 6월 미완의 과제를 안고 활동을 중단했다.
참사 500여일 만에 실질적인 활동 시작
참사 직후 우리사회에 철저한 원인규명으로 또 다른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세월호의 침몰은 명백한 인재(人災)였기 때문이다.
국회는 2014년 11월 ‘4ㆍ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법의 제1조에서 밝힌 대로 “참사의 발생 원인ㆍ수습 과정·후속 조치 등 사실관계와 책임소재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를 지원하며 재해·재난 예방과 대응방안을 수립해 안전한 사회를 건설·확립”하기 위해서다.
2015년 1월 1일 특별법 시행과 함께 특조위도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그해 8월까지 특조위는 진상조사 착수는 커녕 인원구성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활동예산이 8월 4일에야 배정됐기 때문이다.
예산배정이 늦어진 원인은 특조위 규모와 업무를 규정한 ‘특별법 시행령’ 제정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특조위가 ‘제한없는 진상규명조사’를 계획한 것과 달리 해양수산부와 여당은 특조위의 업무범위를 ‘정부조사자료 분석’ 등으로 축소하려 했다. 특조위가 사무처 인원 규모를 125명으로 제안하자 김재원 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사무처 인원이 많다”며 ‘세금도둑’이라고 지적하는 등 초반부터 많은 견제를 받았다. 결국 특조위는 해수부 안에 따라 규모와 예산을 축소해 사무처를 구성한 뒤 2015년 9월 1일 첫 팽목항 현장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참사일로부터 504일이 지난 뒤였다.
실권 없는 특조위의 고군분투
특조위는 출범 이후에도 걸림돌이 많았다. 진상규명의 핵심 사안들을 정치적 갈등 때문에 조사조차 못했고 주요 증거ㆍ증인 확보에 애를 먹었다. 약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활동기간도 특조위의 발목을 잡았다.
특조위는 처음부터 수사권 없이 조사권만 보유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특조위는 조사를 위해 정부의 내부 자료를 필요로 했으나 자료수집 강제권이 없어 번번이 자료 확보에 실패했다. 조사관들은 사고 당시 군과 해양경찰의 초동 조치가 적절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주파수공용무선통신(TRS) 녹취록을 받기 위해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 앞에서 밤샘 농성을 벌였다.
청문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됐다. 1ㆍ2차 청문회 핵심 증인인 신정택 전 한국해양구조협회장이나 김윤상 언딘 사장, 김한식 전 청해진해운 대표 등은 아예 출석하지 않았다.
명목뿐인 독립성 때문에 ‘성역없는 조사’도 어려웠다. 2015년 11월 23일 특조위는 제19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및 및 청와대 지시 대응 사항 등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여당추천 위원 4명이 반대하며 위원직을 사퇴했다. 여권 역시 위헌적 발상이라며 특조위를 비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제대로 조사하기도 전에 활동기간이 끝난 점이다. 애초에 이름뿐인 출범이 원인이었다. 정부는 특조위 활동 기간을 1년 6개월로 정한 특별법에 따라 2016년 6월이 특조위 활동 종료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조위에서는 정부 예산이 배정된 8월 이후 실질 활동을 시작한 점을 들어 2017년 2월까지 활동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 6월 30일 예산 지원을 중단해 특조위 활동을 종료시켰다. 총 211개 조사사건 중 오직 1건 ‘세월호 도입 후 침몰까지 모든 항해시 화물량 및 무게에 관한 조사의 건’만 해결된 상태였다.
끝까지 책임지려 한 조사관들
이석태 특조위원장을 비롯한 조사관들은 활동 중단 후 지난해 7월 27일부터 석 달에 걸쳐 활동 연장을 요구하는 릴레이 단식을 했다. 예산이 끊긴 7월부터 월급도 받지 못했지만 사비를 털고 복사비와 전기세를 아껴가며 조사를 계속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1, 2일 특조위 제3차 청문회가 열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물론 정부가 예산 지원을 재개하는 등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특조위 조사관들은 보고서 정리를 위해 제공된 3개월간 사비를 털어 마지막 청문회를 열었다. 그들의 손을 잡으며 응원한 유가족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청문회에는 증인 41명 중 8명만 출석했다. 정부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겨우 밝혀낸 것은 TRS 분석을 통해 정부가 투입한 선체수색용 무인잠수정이 선체진입에 실패한 점이었다. 김경민 전 피해자지원점검과 조사관은 “(청문회가) 잘 되지 않을 것을 알고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30일 공식 자료정리 기간이 끝나면서 특조위 사무실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하지만 이후에도 10여명의 조사관은 생업을 뒤로한 채 서울 마포구 한국 YMCA 전국연맹 사무실에서 ‘세월호특조위조사관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향후 출범할 2기 특조위에 그동안 조사내용과 경험을 전수해 그들이 밑바닥부터 시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조사관 모임은 최근 유가족들을 통해 선체조사위원회에 미수습자 수습계획 및 선체조사계획 자료를 전달했다. 또 일부 조사관들이 선체조사위 설립준비단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하루 빨리 2기 특조위가 출범돼야 한다고 말한다. 선체조사위 역할은 참사 원인 규명에 그치지만 특조위는 책임자 규명, 제도 개선, 피해자 지원책까지 마련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대선주자들 역시 2기 특조위에 대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심상정 후보는 권한을 강화한 2기 특조위를 반드시 만들고 필요하면 특별검사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이다. 안철수 후보도 조사권을 강화한 특조위를 만들겠다는 밝혔다. 유승민 후보는 정치적 중립성을 강화한 특조위 구성을 주장했다. 홍준표 후보는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2기 특조위 구성을 위한 법적 기반은 상당 부분 갖춰졌다. 지난해 12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한 ‘사회적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은 현재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돼 11월까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때를 기다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돌아왔다. 김형욱 전 특조위 언론팀장은 “여야가 빠르게 결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사관들은 국민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활동을 접은 것에 아직도 깊이 자책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2기 특조위가 구성돼 우리가 못다한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입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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