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하는 대학생 김가람(23ㆍ대전보건대 치기공과)씨의 한 달 생활비는 10만원이다. 군 제대하고 6개월 간 일해서 모은 돈으로 8개월치 월세를 미리 내고 나머지를 쪼개어 생활비로 쓰고 있다. 돈을 아끼느라 밥은 늘 집에서 먹는다. 찌개를 끓여서 2, 3일 내내 먹는 식으로 버틴다. 2월부터 그렇게 살았다. 가난한 청춘에 과일은 사치다. 그런 그가 지난 주 처음으로 딸기와 바나나를 사 먹었다. 매달 50만원씩 6개월 간 기본소득을 받게 된 덕분이다. 대전 청년들의 기본소득 실험인 ‘띄어쓰기 프로젝트’ 세 번째 수령자다.
프로젝트 홍보물을 보고 기본소득을 처음 알았을 때 그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당첨되니 신기했다. 3월에 첫 달치가 들어오자 1만원이던 통장 잔고가 51만원이 됐다. 토스트를 사 먹어 볼까. 평소 그냥 지나치던 학교 앞 가게에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깜짝 놀랐다.
띄어쓰기는 지방 최초로 대전 청년들이 후원금을 모아 시작한 기본소득 실험이다. 2017년 기준 최저시급 6,470원 이상 후원자를 모집해 그들 중 3명을 공개 추첨해서 6개월간 월 50만원을 지급한다. 김가람씨에 앞서 장경춘(30ㆍ크로스핏 운동 코치), 김다영(24ㆍ충남대 언론정보학과)씨가 당첨돼 2월부터 받고 있다. 십시일반 크라우드 펀딩에 240여 명이 참여했다. 여기에 기본소득대전네트워크 후원금을 보태서 900만원을 확보했다. 대상을 제한한 건 아닌데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다 보니 수령자도 청년이 당첨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원 8명도 모두 20~30대 청년이다. 소규모의 한시적 실험이지만 청년이 주체가 되어 진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프로젝트는 “띄어쓰기도 없이 범람하며 밀려오는 나날”(김승희 시 ‘반투명한 불투명’)에 띄어쓰기를 해보자고 제안한다. 프로젝트 팀장 서한나(26)씨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생계에 치여 허덕이는 삶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져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2년 전 기본소득을 처음 알고 “바로 이거다. 이거 하나면 살 수 있다. 이거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년 8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전을 주제로 대전 청년들이 만드는 잡지 ‘보슈’(‘보세요’의 충청도 사투리) 편집장이다. 잡지는 돈벌이가 안 된다. 생계가 걱정되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는 돈이다.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또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쪽과, 기본소득이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로 만들 거라며 반대하는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기본소득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주요 논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헬조선 청년들에게 박근혜 게이트에 등장한 금수저 승마 선수는 “돈도 실력”이라며 “네 부모를 원망하라”고 말해 분노를 샀다. 기본소득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당연시하는 시각을 거부한다. 적어도 출발선은 같아야 다른 삶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환대를 경험해 본 적이 이 나라에서 기본소득이 얼마나 낯선 개념인지는 김가람씨도 실감한 바다.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이해를 잘 못해요. 그런 게 정말 있어? 어디에 썼는지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보고 안 해도 된다고? 말도 안 돼. 왜 주는데? 목적이 뭔데? 사기 아니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그렇게들 말하죠. 저도 처음엔 어색했어요. 제 돈이 아닌 거 같고 쓰면 안 될 거 같아서 며칠 고민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나요? 먹고 사는 건 당연한 권리인데 그걸 고민한다는 게.”
띄어쓰기팀은 기본소득이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령자 세 명을 매달 인터뷰하고 있다. 15일 대전에서 이들을 만났다. 다들 ‘요즘 좋아 보인다, 표정이 밝아졌다, 웃음이 많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기본소득 덕분에 걱정이 줄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며 ‘돈 때문에 포기했던 여행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
띄어쓰기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당첨자인 장경춘씨에게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사치를 허락했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멍 때리기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그는 ‘돈 때문에 늘 작은 잔만 시키다가 큰 잔을 마시니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운동 코치인 그의 월 수입은 170만원 정도. 월세 30만원에 공과금, 교통비, 통신비, 건강보험료, 기름값 등 고정비 80만원을 내고 나머지 60만원이 식비다. 옷이나 물건은 거의 사지 않는데도 저축은 못하고 여가 활동은 부담스럽다. ”운동 코치라 잘 먹어야 해서 식비 압박이 컸는데, 기본소득 덕분에 그런 압박이 사라졌어요. 2% 부족했던 게 채워진 느낌이랄까. 운동 가르치면서 정작 저 자신은 운동을 못했는데 운동에 돈을 쓸 수 있게 됐고요.”
이들에게 기본소득으로 생긴 가장 중요한 여유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으로 보인다. 김가람씨는 띄어쓰기 프로젝트에 당첨됐다는 전화를 받고 그날 오전 구했던 일당 5만원 아르바이트를 안 하기로 했다. 그가 월 10만원 생활비로 버티는 것은 전공인 치기공 실습과 좋아하는 음악 밴드 활동을 하느라 아르바이트 할 시간이 없어서다. 생활의 유일한 활력인 밴드를 돈을 벌기 위해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김다영씨에게도 기본소득은 좋아하는 것을,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자유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다니면서 잡지 ‘보슈’의 에디터로 활동하는 그는 대학 입학 이후 줄곧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모자란 부분은 조금씩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기본소득이 들어오자 40%를 등록금 분할 납부와 토플 등록에 썼다. 외국에서 일하고 싶어서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그는 학원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기본소득 수령자가 되어 고민을 해결했다.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우던 저녁을 좀 더 나은 토스트를 사 먹을까도 생각하게 됐다.
“기본소득 덕분에 부담이 훨씬 줄었어요. ‘보슈’를 그만두면 그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불가능할 거 같아서 한동안 접어뒀던 여행도 생각 중이에요. 예전에 잠깐 유럽 배낭여행을 해봤는데, 그때 제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했죠. 세상은 이렇게 넓은데 대전에 갇혀 살긴 싫어요. 제게 여행은 배움이에요.”
띄어쓰기 프로젝트는 6개월 간의 단기 실험이다. 월 50만원은 생계를 보조하는 수준이지 충분한 돈은 아니다. 이걸로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김다영씨는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번 제대로 상상해보면 달라지지 않겠어요? 바나나가 노랗다고 상상하는 것과 직접 먹어보는 것의 차이 같은 거죠. 기본소득은 전엔 상상도 못했던 것에 물꼬를 틔워주는 게 아닐까요? 월 50만원 기본소득을 받아보니 안정감이 커요. 150만원 정도 받으면 전복적일 거 같아요. 누구나 기본소득 받아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산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요?“
장경춘씨 생각도 같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누구나 밥 먹을 걱정은 안 해야죠.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송파 세 모녀가 죽지 않았을 거에요. 기본소득을 주면 노는 사람이 늘어난다고요? 저는 그 반대로 일할 의욕이 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일하고 싶어도 여러 이유로 못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이들은 기본소득으로 다른 삶을 상상할 여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인생을 더 열심히, 주체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도 이구동성이다. 띄어쓰기 프로젝트는 희망을 쏘아 올렸다. 대전=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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