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봄꽃처럼 저절로 만개하는 자만심을 누르라”

입력
2017.04.22 04:40
0 0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 궁궐에 있는 부조물.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다리우스 왕, 그 뒤에 서있는 인물이 아들 크세르크세스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정복으로 아버지의 제국건설 위업을 뛰어넘고자 했다.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 궁궐에 있는 부조물.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다리우스 왕, 그 뒤에 서있는 인물이 아들 크세르크세스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정복으로 아버지의 제국건설 위업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 순간’만이 가치가 있다. 내 삶의 수련은 이 찰나를 포착하여 나를 위한 최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진입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중적이다. 지금은 과거이며 동시에 미래다. 이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이 ‘묵상’(默想)이다. 묵상은 내가 자신에게 타자가 되어, 제 삼자의 눈으로 현재의 나를 보는 시선이다.

제3자가 되어 자신을 심오하게 보는 연습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들에게 철학공부를 권유하는 책 ‘프로트렙티구스’에서 자신을 포함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심오하게 보는 묵상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불렀다. ‘쎄오리아’라는 그리스 단어는 영어에서 ‘이론’이란 의미의 ‘씨오리’(theory)의 어원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100m 달리기를 보는 관객들을 상상해보자. 심판관이 이제 막 총성을 울리기 직전이다. 관람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 그 순간에 숨을 죽인다.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의 준비 자세를 조용히 보고 있다. 관객은 이 순간에 자신은 없어지고 그 선수의 섬세한 움직임에도 반응한다. 그는 선수와 혼연일체가 되어 10초 정도를 함께 달린다. 이런 행위를 바로 ‘쎄오리아’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시작한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시민들의, 자기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공동체 수련이었다. 그들은 그런 장소를 ‘테아트론’(theatron), 즉 ‘극장’이라고 불렀다. ‘테아트론’은 무대 위 비극배우의 움직임과 말을 관찰하여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결국 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수련장이다. 그 장소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여느 장소가 아니다. 모든 아테네인들은 일년 중 만물이 소생하는 춘분(春分)에 일상을 떠나 극장이란 거룩한 공간이자 경계로 진입하여 일주일을 보낸다. 그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비극작품을 관람한다. 그들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자신의 오만을 직시한다. 그들은 오만한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정신적인 부활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리스 최초의 비극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크세르크세스 왕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에게 크게 패한다.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토사는 페르시아 제국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한다. 페르시아 전령이 살라미스에서 살아 돌아와, 크세르크세스는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토사가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테네인들도 한 순간에 아토사와 하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의 원수인 페르시아를 아토사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한다.

아버지 다리우스를 뛰어넘겠다는 성급함

아토사는 페르시아 제국이 패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 원로들은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이며, 아토사의 남편인 다리우스의 혼을 불러내 그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리우스가 말한다. “지하세계에서 올라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가 지상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으니, 빨리 말해보라. 무엇이 페르시아를 억누르고 있는가?” 다리우스는 원로들이 페르시아를 덮친 불행을 말하지 않자, 이번에는 아토사에게 묻는다. “여왕, 아토사여! 말해보십시오. 애통과 눈물을 그치십시오. 명료하게 말하십시오. 슬픔은 사람의 운명이며, 인간은 슬픔을 견뎌야 합니다. 슬픔이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왔군요.”

아토사는 말한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들어보세요. 페르시아의 명성과 제국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성급함으로 아시아(페르시아)의 모든 젊은이들을 아테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크세르크세스와 몇 명만 살아 돌아오고 있습니다.” 다리우스가 한탄한다. “내 아들이 젊은 혈기의 성급함 때문에 신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사고를 쳤구나. 그가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길을 내려고 시도했다니! 그가 헬레스폰드 해협을 노예처럼 엮으려 하다니! 그가 자연을 이기려고 바다를 육지로 만들어 군대들이 건너가기 위해 쇠로 해협을 속박하다니! 죽을 운명을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난 그가 불멸의 신들, 특히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이기려 하다니. 내 아들이 미쳤구나. 내가 어렵게 쌓아 올린 부가 약탈자의 먹잇감이 되었구나!”

아토사와 다리우스 모두 크세르크세스의 ‘무모함’을 한탄한다. ‘성급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 ‘쓰라소스’(thrasos)는 위에서 언급한 ‘쎄오리아’와 정반대 단어다. 무모함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성급함에서 비롯한다. ‘성급함’은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시간을 두고 다양한 시각으로 깊이 보는 인내가 부족한 상태다. 다리우스는 터키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이집트에서 스키타이까지 23개국을 정벌하여 최초로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 다리우스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에서 아테네에게 패하자,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를 정벌함으로써 아버지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리라고 결심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만이었다. 오만은 무모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는 어리석게도 수십만의 용병을 데리고 페르시아에서 아테네로 원정을 떠난 것이다.

성급함은 사람을 아둔하게 만든다

다리우스는 아들의 어리석음을 ‘페르시아인들’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영원히 살 것 같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자만심(휴브리스)을 제어하는 방법을 반드시 수련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그냥 두면 봄에 꽃이 저절로 피듯이) 만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열매는 맺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사리분별이 없는 ‘아둔함’이다. 그리고 그는 쓰디쓴 수확인 눈물을 거둘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인생여정에서 가야만 하는 길이 하나 정해져 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깊이 보는 묵상수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지름길이 있다. 우리가 그런 거룩한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길이 자신에게 유일함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간 길을 곁눈질로 살펴본다. 심지어는 그 길이 좋아 보여 부러워하고 흉내 낸다.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이 무식(無識)이며, 그런 길을 따라 하는 것이 자살행위(自殺行爲)다.

‘아둔함’으로 번역한 그리스 단어는 ‘아테’(ate)인데, 그 의미가 다양하다. ‘아테’는 원래 하늘 신 제우스의 딸로 ‘오만’한 자들의 행동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아테’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하지 않아 생기는 ‘자신과 주위에 대한 망상ㆍ나쁜 행위ㆍ아둔함ㆍ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높은 수준에서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위험이 자신의 눈앞에 와도 볼 수 없다. ‘오만’의 결과는 ‘아둔함과 장님의 모습’이다. 아둔한 자를 기다리는 것은 슬픔뿐이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이 아들의 오만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실의에 차 다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페르시아 원로들이 슬피 운다. “슬프도다. 수많은 고통의 소식들만 듣다니! 오, 페르시아 민족이여, 고통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러자,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초래한 장본인 크세르크세스가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빛나는 왕복 대신 다 찢겨진 누더기를 걸친 채 나타났다.

뒤늦은 탄식, 슬픔을 담을 단어가 없다

‘페르시아인들’의 나머지는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 온 크세르크세스와 원로원들이 주고받는 노래로 이어진다. 이 부분의 특징은 크세르크세스의 절규하는 울음소리다. 아이스킬로스는 판독이 불가능한 울음소리를 곳곳에 배치하였다. ‘오토이’ ‘오토토토토이’ 같은 알 수 없는 의성어 절규가 반복된다. 그의 슬픔을 담을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슬퍼한다. “원로들이여, 당신들이 퇴장하면서 슬피 우십시오. 우리의 삼단 갤리선에서 죽어간 사람들이여, 아 슬프도다.”

마지막으로 원로들이 노래한다. “자, 주인이시여! 우리가 당신을 눈물로 배웅하겠습니다. 당신의 슬픔으로 가득한 궁궐로 인도하겠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던, 아테네 원형극장의 그리스인들도 하나 둘씩 숨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죽은 자신들의 아버지, 형제, 아들을 위해서 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울기 시작한 것이다. 원수를 위해 울 수 있는 ‘자비’(慈悲)라는 눈물이 씨앗이 되어 그리스 문명과 서양문명의 꽃을 피운 것이다.

영국 작곡가 헨델(1685-1759)은 궁궐로 돌아와 과거를 회상하며 회한에 차 노래하는 크세르크세스의 심정을 ‘세르세’(크세르크세스)라는 아리아로 작곡하였다. 아리아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움브라 마이 푸’(그런 그늘은 결코 없었다)를 이탈리아 성악가 세실리아 바르톨리의 음성으로 감상하시길 권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OdeOyrLHdSg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원전 인용은 모두 필자 번역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