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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지구화’와 기억의 연대

입력
2017.04.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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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트란 둑 루옹 베트남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김 대통령은 베트남참전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8년 트란 둑 루옹 베트남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김 대통령은 베트남참전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구화’ 하면 곧 다국적기업이나 신자유주의를 연상하는 한국사회의 인식 지평에서 ‘풀뿌리 지구화’나 ‘지구화의 해방적 성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지구화’는 지구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전지구적 시민사회/공공영역의 등장은 ‘아래로부터의 지구화’라는 대안적 가능성을 엿보여준다.

2000년 아파두라이가 ‘풀뿌리 지구화’를 위한 창의적 상상력을 요청한 이래, 지구화를 정치적 해방의 기제로 삼으려는 시도들은 꾸준히 있었다. 국제적으로 기억 연구를 주도해 온 아스만과 글로벌 히스토리의 선도적 중견연구자 콘라드가 11편의 다국적 논문을 묶어 공동 편집한 이 책은 넓게 보면 ‘아래로부터의 지구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풀뿌리 지구화’의 시각에서 ‘내재적 지구화’를 다루고 있다. 자본과 노동, 교역과 이주 등 하드웨어의 지구화와 달리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도덕적 가치규범 등으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의 지구화가 그것이다. 더 좁혀서 말하면, 지구화가 개인적 기억이든 집단적 기억이든 기억의 생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물음이 이 책의 화두인 것이다.

국경을 넘는 이주자들은 몸뚱이만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유산, 기억과 트라우마까지 가지고 간다. 동시다발적으로 동질적인 기억문화가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게토와 강제수용소가 있던 폴란드나 발트 삼국,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심지어는 일본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등에서 홀로코스트가 기억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Memory in a Global Age: discourses, practices and trajectories

(글로벌시대의 기억: 담론들, 실천들 그리고 궤적들)

Aleida Assmann and Sebastian Conrad ed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10), 252+xiii

전지구가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전세계의 시청자들이 CNN이나 알자리라 위성방송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좇고 있는데, 기억은 더 이상 민족적이거나 국가적일 수 없다. 전지구적 공공영역에서 전파되어 공유되거나 경합하며 논의되는 기억의 지구화는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 싼 한국과 일본 간의 기억의 갈등이 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독일까지 연장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저자들에 따르면, 기억의 지구화 과정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사과’가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멀리는 중세의 종교재판부터 대서양 노예무역, 마오리족과 아보리진 탄압, 드레퓌스 사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 해당국가의 사죄를 끌어 낸 비극적 기억의 목록은 꽤나 길다.

1996년 부활절 일요일 독일의 쾰른에서 출발한 2,000명이 넘는 신교도 사죄 행렬이 십자군 원정길을 따라 들르는 도시마다 사죄한 행보는 특히 흥미롭다. 책에는 빠져 있지만, 고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베트남 방문시 월남 참전에 대해 사과한 것도 이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협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글로벌한 기억 공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대화는 이처럼 가해자의 사죄를 통해 시작되며, 쌍방은 ‘사과와 용서’의 협상에 나서게 된다. 이 점에서 사과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기억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문제의식을 동아시아에 대입해보면, 군위안부 과거에 대해 ‘묻지 마 화해’를 강요하는 한일외교협상은 기억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한 기억공간은 ‘기억의 연대’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베트남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적 제노사이드의 기억이 만나고, 미국 노예제와 인종주의에 대한 기억은 홀로코스트의 비유를 업고 유럽에서 온 유대계 이민자들에게 더 깊이 각인되기도 한다. 아프리칸-아메리칸, 베트남인, 팔레스타인인 등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스스럼없이 연결시키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을 통해 기억의 연대는 더 공고해진다.

위안부를 상징하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기억을 통한 연대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위안부를 상징하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기억을 통한 연대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태평양을 건너 뉴욕의 홀로코스트 센터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만난 일본군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은 그 ‘기억의 연대’를 상징한다. 글로벌한 기억공간에서 기억의 연대는 타자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한 인류의 감수성이 예민해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전 세계에 생중계된 집단적 성폭력의 참상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글로벌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발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한편 ‘기억의 연대’라는 내재적 지구화의 이면에서 기억의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아시아 이웃에 대한 자신의 가해사실을 덮고 ‘세계 유일의 원폭희생자’임을 강조하는 일본의 기억정치나 연합군의 공습과 소련군의 집단 강간 등을 자신의 피해를 부각시키는 독일 우파의 역사관, 홀로코스트를 근거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주의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의 점령정책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나는 그것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반인간적 범죄의 희생자들을 대상화하고 정치적 자산으로 전유한다. 마치 ‘한류’를 수출하듯 소녀상을 세계 각지에 설치하겠다는 탈역사적 발상이나 개발독재 시대 전국 각지에 세운 이승복 어린이 동상처럼 각급학교의 교정에 소녀상을 설치하겠다는 움직임은 적이 걱정된다.

자칫하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멜로드라마로 만든 할리우드의 기억문화처럼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멜랑콜리적 미학과 감정의 과잉에 중독되어 정작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이 진부한 형식으로 상투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글로벌한 기억공간에서 ‘기억의 연대’를 추구하는 대신 자기 민족의 희생을 특권화시키려는 기억의 정치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의 증언과 목소리는 글로벌한 기억공간에서 보편적 해방의 메시지와 도덕적 힘을 잃고 희미하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일본 우파의 막가파적인 부정론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기억의 적’인 것이다.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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