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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그를 이끌었다… 문재인 대통령 ‘인생 5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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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그를 이끌었다… 문재인 대통령 ‘인생 5막’

입력
2017.05.09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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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시절 문재인과 노무현 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과 노무현 전 대통령

“1219, 끝이 시작이다.”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대선 패배 후 쓴 반성문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2017년 5월 9일, 4년여의 절치부심 끝에 그는 마침내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됐다. 2008년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청와대 살림을 책임지다 청와대에서 나온 지 9년 만의 복귀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남자’가 아닌 ‘대통령 문재인’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하는 문 당선인의 어깨에는 적폐청산과 사회통합이라는 만만치 않은 양대 과제가 놓여있다.

문재인 증명사진/2017-05-09(한국일보)
문재인 증명사진/2017-05-09(한국일보)

<1막> 피란민의 아들, 문재인

문 당선인은 1953년 1월 경남 거제 피란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난 문 당선인의 부모는 경남 거제의 피란민수용소에 터를 잡았다.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부산 영도의 판잣집에 살던 시절 예닐곱 살 문재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신선동 성당에서 나눠주던 강냉이 가루를 받으려 긴 줄을 서야 했다.

문 당선인은 과외 없이도 명문으로 꼽히던 경남중에 입학했다. 중학교 입학시험 중 하나인 턱걸이 시험 성적이 좋지 않자 ‘뼈가 유연해진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빙초산을 마실 정도로 악착같이 공부한 결과다. 하지만 학교에서 빈부격차를 실감하며 반항심도 커졌다. 경남고 시절에는 싸움에 휘말려 정학을 당하는 등 ‘문제아’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문 당선인은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과 동시에 제적됐다. 이후 강제징집으로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 그는 ‘A급 사병’으로 제대했다. 문 당선인은 “학교에서는 벌 받기 바빴는데 군대 가서는 상을 더 받았다”고 회고했다.

문 당선인은 제대 후 복학이 안 돼 낭인으로 지내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을 맞은 뒤 사법시험 도전을 결심했다. 같은 대학 성악과 2년 후배 김정숙씨와는 7년 간의 연애 끝에 1981년 결혼했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자, 대형 로펌의 영입제안을 뿌리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위해 1982년 부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의 지기’가 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특전사 시절
특전사 시절

<2막>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 당선인은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부산의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난 당일 그는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 대해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ㆍ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간판을 내걸고 지역의 시국사건들을 도맡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죽이 잘 맞는 동지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문 당선인보다 일곱 살이나 위였지만 늘 그에게 깍듯한 높임말을 썼다. 실제로 문 당선인은 ‘노무현의 친구’로 통했다. 2002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이 부산 선거대책본부 출범식에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총선에서 당선되자 “뒷일은 맡기고 정치권으로 가시라”며 자신은 지역에 남았다. 문 당선인은 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이 힘들어하자 변호사로 돌아오라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선거를 도왔다.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이 결정되던 날을 “내 생애 가장 기쁜 날 중 하나였다.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나 고난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변호사시절
변호사시절

<3막> 대통령의 남자, 문재인

정치는 그의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3년 1월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문 당선인은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 는 두 가지 조건을 걸고 이를 수락했으나, 결국 모두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돼버렸다. 대통령의 참모가 된 문 당선인은 검은 비닐봉투에 속옷과 양말만 달랑 싸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이듬해인 2004년 민정수석을 사퇴한 다음 히말라야 트래킹에 나섰다. 건강 악화와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 요청을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네팔 현지에서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귀국한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컴백했고, 이후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함께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청와대에서 일한 셈이다.

문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원칙주의자로 통했다. 굳게 다문 입에 말을 아끼는 비정치적인 태도의 부산 남자를 두고 당시 기자들은 “절대 정치는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는 그를 정치인의 길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절제력과 의연함을 보여준 ‘상주 문재인’에 주목했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에 힘 입어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문재인 대망론’이 일었고, 문 당선인은 결국 2012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학창시절
학창시절

<4막> 직업 정치인, 문재인

문 당선인은 18대 대선에서 안철수 당시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로 야권 단일주자가 됐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역대 대선 패배후보로는 최대라는 48.02%(1,469만2,632표)의 득표율을 얻었지만, 끝내 진영대결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선 패배 후 정치적 동안거에 들어갔던 문 당선인은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사건, NLL포기 논란 등이 그를 세상 밖으로 다시 이끌었다. 문 당선인은 대선 패배에 관해 “거기까지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소명의식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대권 재도전의 길을 걸었다.

정치인 문재인으로 홀로 서기를 한 이후 얻은 건 세력이다. 1년이 채 안 되는 당 대표 기간을 통해 당권을 장악하고 친노 진영을 친문(親文) 세력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친문 패권주의라는 새로운 공세에 시달렸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안철수, 박지원, 김종인 의원 등은 패권주의를 지적하며 당을 떠났다. 민주당은 쪼개졌고, 문 당선인은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섰다. 20대 총선에서 패할 경우 그의 정치인생은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 당선인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당 대표직을 내려놓은 채 발톱이 빠지도록 전국을 누볐다. 이처럼 정치적 고비마다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돌파하자 ‘문재인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원내1당이 되는 승리를 견인하면서 다시 명실상부한 당의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문재인 대학시절
문재인 대학시절

<5막> 준비된 대통령, 문재인

문 당선인은 정치 입문 6년 만에 두 번의 대선 도전사를 썼다. 그는 19대 대선에 도전하면서 “더 이상 운명은 없다. 숙명이다”는 말을 되뇌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선 노 전 대통령의 계승자로 운명처럼 떠밀리듯 나섰지만 이번 도전은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선 재수에 대해 “지난 대선보다 훨씬 절박해졌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발생한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건이 대선 재도전의 확실한 명분이 됐다는 것이다. 문 당선인이 대선 재수를 ‘패배를 책임지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다행히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 밀렸던 지지율이 반등했다. 5년 전 ‘준비된 여성 대통령’에게 패배했던 문 당선인은 이번엔 ‘준비된 대통령’을 꺼내 들고 국정 혼란을 수습하겠다고 나섰다.

문 당선인은 당내 경선에서는 무난히 승리했지만, 경선 종료 직후부터 몰아친 ‘안철수 바람’에 직면해야 했다. 경선에서 안희정 충남지사 캠프에 참여했던 비문(비문재인) 의원들의 탈당설이 불거졌고,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에서 촉발된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방침’ 논란으로 보수 진영의 안보공세도 거셌다.

문 당선인은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다. 다음은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결집력이 강한 그의 고정 지지층은 유세장마다 구름인파를 모으면서 ‘문재인 대세론’의 한 축을 떠받쳤다. 문 당선인은 끝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랐다. 대통령의 남자,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그는 이제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시대’를 열게 됐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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