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인 미아(에마 스톤)가 연기를 펼쳐보인 뒤 "너무 향수에 빠져 보여"라고 자평하자, 세바스천(라이언 고슬링)은 "그게 핵심이야"라면서 그 연기가 옳았다고 확언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감독상을 받은 데미언 셔젤의 뮤지컬 '라라랜드'에서 달콤한 낭만과 향수는 그 자체로 핵심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 시퍼런 욕망과 지독한 광기가 이끌었던 셔젤의 전작 '위플래쉬'와는 정반대 자리에 놓인 작품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뛰어난 작품에 각각 드리운 온기와 냉기를 걷어내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매우 닮아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몰두하는 모가 난 성격의 외골수 남자 뮤지션이라는 점에서 같다. 극중 재즈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라라랜드'의 스토리는 '위플래쉬'의 주인공 앤드류(마일스 텔러)가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겪게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쓸쓸한 여운이 긴 꼬리를 남기는 세 장면이 '라라랜드'에 숨어 있다. 어쩌면 셔젤은 음악(꿈)과 삶(관계)을 굳이 구분 지은 뒤 끝내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그 둘을 그려내는 비관주의로 유사한 모티브를 변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라랜드'와 '위플래쉬'는 결국 모두 사랑 대신 꿈을 선택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삼바와 타파스
음악에 대해 근본주의적 태도를 지닌 세바스천은 유서 깊은 로스앤젤레스의 음악 클럽이 경영난 때문에 '삼바 앤드 타파스'란 이름으로 요리를 함께 파는 것을 보고 이렇게 내쏜다. "세상에, 삼바와 타파스(스페인 전채 요리)라니, 웬 양다리? 하나만 잘 하지."
그랬던 세바스천 자신이 음악과 요리를 함께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평소 자신의 소신과 다른 음악을 하는 밴드에 새로 가입하게 된 그는 순회공연 활동 때문에 소원해지게 된 미아와의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둘만의 자리를 만들고 직접 요리도 한다. 하지만 진로와 관련된 상반된 대화 끝에 마음이 상한 세바스천은 잔뜩 뒤틀린 말로 미아에게 상처를 줘서 떠나게 한 후 요리마저 그 사이에 다 타버렸음을 알게 된다. 하나만 골라야 할 때, 세바스천은 결국 '타파스(사랑)' 대신 '삼바(꿈)'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레스토랑과 극장
미아는 좀 다르지 않을까. 미아는 새로 만나게 된 세바스천에게 마음이 크게 끌리지만 미리 해둔 약속 때문에 남자친구 그렉과 레스토랑으로 간다. 원치 않는 식사 자리에 앉아 갈등하던 미아는 때마침 레스토랑 스피커에서 세바스천이 이전에 연주했던 곡이 흘러나오자 극장으로 뛰어간다.
언뜻 이건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레스토랑 식사 자리에서 미아는 "요즘 극장이 너무 더럽고 형편없다"는 말을 들었다. 배우로 성공하길 원하는 미아로선 꿈의 터전을 부정당하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그렉은 그 당시 미아의 연인이었다. 그러니 세바스천에게 달려간 미아의 행동 역시 사실상 타파스(레스토랑) 대신 삼바(극장)를 선택하는 일인 셈이다. 게다가 그 직후 극장에 들어섰을 때 우연히도 미아의 몸에 영사된 영화가 겹쳐지게 되니, 그녀는 그 자체로 예술의 일부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이모의 이야기
꿈을 향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미아는 세바스천의 격려로 용기를 내어 중요한 오디션 무대에 선다. 심사위원들은 배우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찍으려고 하니 지금 떠오르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잠시 생각하던 미아는 이모가 파리의 센 강에 맨발로 뛰어들었던 일화에 대해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모에 대한 이야기라면 '라라랜드'에서 관객은 이미 그 전에 한번 더 접한 적이 있다. 미아가 세바스천에게 이모와 영화를 본 후 극중 장면을 함께 연기하곤 했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해 말했던 장면에서였다. 그렇다면 미아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될 그 오디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왜 하필 이모 혼자 맨발로 강물에 뛰어든 에피소드였어야 하는 걸까.
미아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는 것은 이모와 미아 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모 혼자의 이야기였다. 또한 미아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모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미아 자신의 고향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가 가본 적이 없는 파리에서의 이야기였다. 결국 미아가 손을 뻗은 것은 이모와의 추억(관계)이 아니라 이모의 꿈(예술)이었다.
'라라랜드'는 함께 쌓아온 관계의 역사보다 홀로 키워온 꿈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두 예술가의 빛나는 성공담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그건 꿈을 향해 질주하느라 관계를 상실해버린 두 연인의 아픈 실패담인지도 모른다.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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