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허스토리
질르포어 지음ㆍ박다솜 옮김
윌북 발행ㆍ463쪽ㆍ1만7,500원
지난해 10월 유엔 직원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고 앉았다. 1970년대 TV시리즈물 ‘원더우먼’의 주연배우 린다 카터, 곧 개봉할 영화 ’원더우먼’의 주연배우 갤 가돗이 입장할 때였다. 유엔이 원더우먼을 여성인권 신장 명예대사로 임명하려 하자, 이에 대해 항의의 표시였다. 하필이면 그토록 헐벗은, ‘핀업 걸’ 같은 여성이 여권신장이라니.
아쉬울 법도 하다.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 아테나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헤르메스의 속도”를 지녔다고 설정된 슈퍼영웅이 원더우먼이다. 하지만 왜 하얀 별이 박힌 파란 팬티에 허리를 비정상적으로 조이고 가슴을 한껏 끌어모아 부풀린 붉은 색 뷔스티에 상의를 입어야 했을까. 왜 직업은 하필 비서였을까. 그리고 왜 그리도 자주 밧줄과 쇠사슬에, 그것도 아주 묘한 포즈로 묶였어야만 했을까.
‘원더우먼 허스토리’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질 르포어가 원더우먼을 ‘페미니즘의 원형질’이라는 관점에서 추적한 흥미로운 책이다.
슈퍼 히어로물 탄생의 직접적 계기는 2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도 정신 못 차린 인류가 다시 한번 전쟁으로 돌입한 그 때, 영웅적인 그 누군가가 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희망 말이다. “1938년 슈퍼맨이 처음으로 고층 건물 위를 달리고, 1939년 배트맨이 처음 그림자 속에 숨었”다. 그렇다면 1941년 비행기를 타고 마침내 미국에 상륙한 원더우먼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 슈퍼 히어로물에게는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지나친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비난이다. 지금도 그런데, 엄숙한 보수주의가 판치던 그때에는 더 그러했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를 중화하면 된다”고 DC코믹스 사장에게 제안한 이가 있었다. 원더우먼의 원작자 찰스 멀턴이다.
DC코믹스 사장은 여자가 뛰어다니는 만화 따위가 장사가 될까 싶어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해야 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전쟁 중인 만큼 주인공 캐릭터에다 애국적 이미지를 넣어야 하고, 눈요깃거리를 위해 당연하게도 옷의 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물론, 그렇게 하고서도 6개월 내 반응이 없으면 만화 자체를 접겠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축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하나는 멀턴의 의도다. 멀턴의 본명은 윌리엄 몰튼 마스턴. 하버드대 심리학자였다. 그는 여성의 힘을 믿었다. 그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에 대한 심리적 프로파간다로서 원더우먼을 창조했다.” 마스턴은 툭하면 싸움질이나 하는 바보 멍청이 같은 남자들 따윈 다 내다버리고 우수한 여성들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성들이 “세속적으로 성공할 능력을 사랑하는 능력만큼이나 계발한다면” 평화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믿었다. 이 주장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만든 캐릭터가 원더우먼이다. 고작(?) 양성’평등’ 정도만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를 위해 ‘강력한 여성’이라는 개념만 지킬 수 있으면, 그 이외 요구는 모두 받아들였다. 헐벗어서 눈요깃감으로 쓰이면 좀 어떤가. 그만큼 대중들에게 여성의 능력을 더 효과적으로 각인시켜줄 수 있다면 말이다.
원더우먼이 남자들에게 걸핏하면 제압당해 밧줄과 쇠사슬에 자주 묶인다는 설정, 그것도 때로는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또 때로는 변태적으로 보일 정도로 꽁꽁 묶인다는 설정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장면들은 지나치게 야하다는 이유로 DC코믹스 내에서도 계속 문제가 됐다. 그러나 마스턴은 물러서지 않다. 1910년대 활발히 벌어졌던 여성참정권 운동 당시 많이 쓰인, 족쇄를 차고 쇠사슬에 묶여있는 여성 그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얽매임을 스스로 끊어낼 때 여성이 해방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해서다. 또 ‘사이코 박사’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은 하나같이 성차별주의적 발언들로 일관한다.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심리학자이자 열렬한 여권주의자였던 마스턴 박사가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정교하게 만화 속에 녹여 넣었는지 세세하게 보여준다.
책의 다른 한 축은, 마스턴이 왜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20세기 초 유행했던 여성해방운동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짚어나간다. 동시에 마스턴 유족들의 협조로 부인 2명과 함께 살았던 마스턴의 기이한 개인사에 대한 얘기들도 풍부하게 담아뒀다. 이 부분들은 책을 확인해보길.
사실 공짜로 주어지는 권리는 없다. 1940년대 미국 여성도 그랬다. 2차 세계대전으로 남성이 징집되자, 집에서 애나 보라던 여성들은 ‘산업전사’이자 ‘국내방위의 영웅’으로 호명돼야 했다. 원더우먼은 그 시대의 흐름을 탄 캐릭터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귀환한 ‘남성 전쟁 영웅’의 일자리를 위해 여성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7년 마스턴이 죽자 원더우먼은 “베이비시터, 패션모델, 영화배우”가 됐고 “결혼하고 싶어”했고 “연애상담 칼럼에 글을 쓰면서 사랑에 번민하는 이들에게 조언”하는, 본연(?)의 여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60~70년대 글로리아 스타이넘처럼 여권운동에 심취한 이들은 어릴 적 읽은 ‘원더우먼’을 잊지 않고 다시 불러냈다. 2017년 원더우먼이 다시 영화로 나온다. 마스턴의 프로파간다는 여전히 통할까. 유엔 직원들의 반대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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