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前대통령 숙원사업… 편향성ㆍ깜깜이 집필 논란
2년여간 극심한 갈등… 교육부 막판까지 사수 몸부림
내년 배포 목표 새 검정교과서 미뤄질 가능성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적폐’로 지목됐던 역사 국정교과서가 문재인 정부 출범 사흘 만에 폐기 수순을 밟는다. 문 대통령이 12일 취임 후 일자리위원회 설치에 이은 두 번째 업무지시로 국정교과서 폐기를 지시하면서다. 2년여간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며 44억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국정교과서는 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국정교과서 태동
박 전 대통령의 ‘숙원사업’이었던 국정교과서가 본격 추진된 건 2015년 10월.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행정예고하면서였다. 박 전 대통령이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 개발”을 지시한 지 1년8개월 만이었다.
당시 정부는 ‘올바른 교과서’로 명명했지만 국가가 획일적 역사관을 주입한다는 발상은 학생과 학부모뿐 아니라 학계의 극심한 반발로 이어졌다. 하지만 일사천리였다. 그해 11월초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강행했다.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던 박 전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도 그 무렵이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지시가 담긴 것으로 알려진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역사교과서-국정전환-신념’이라는 메모가 발견됐다. 국정교과서가 박 전 대통령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깜깜이 집필, 편향성 논란
교육부는 곧바로 집필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집필진 명단과 편찬기준은 작년 11월28일 교과서 현장검토본이 나오기 전까지 1년여간 공개되지 않았다. 집필진을 공개하라는 시민사회 요구에 교육부는 “공개 시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ㆍ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현장검토본을 공개한 뒤로는 집필진을 둘러싼 편향성 논란이 일고 서술 방식과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속출했다. 공개된 교과서는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으로 서술하는 등 뉴라이트 측 역사관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지적이 들끓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미화나 친일파 행적 축소 역시 논란이 됐다. 현대사 부분 집필진 7명 중 전공자가 한 명도 없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즉각 중단과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전교조는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교과서가 아님’을 선언했고 교총도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국정교과서 사수 몸부림
한 달 간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교육부의 선택은 ‘폐기’가 아닌 ‘연기’였다. 교육부는 2017년에는 지정된 연구학교에서만 국정교과서를 주 교재로 사용하고 2018년부터 국정과 검정교과서를 혼용하기로 결정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민 신뢰가 바닥을 친 상황에서 올해 초 내놓은 최종본 마저 많은 지적을 받자 학교와 학부모, 학생들은 국정교과서를 철저히 외면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정교과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했다. 국정교과서 시범 적용을 위한 연구학교 지정을 강행, 학교 현장을 둘로 쪼개 놓은 것이다. 이는 국정교과서를 고수하는 소수 학교와 이를 반대하는 학부모ㆍ학생 간 충돌로 이어졌고, 전국 5,564개 중ㆍ고교 중 경북 경산 문명고만 유일하게 연구학교로 지정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 그마저도 법원이 효력 정지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정부는 일선 학교에 국정교과서를 보조교재로 뿌렸고, 내년부터는 국ㆍ검정을 혼용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새 정부 전격 폐기, 역사 속으로
한국 사회를 둘로 쪼개 온 국정교과서의 폐지는 결국 문재인 정부의 제1호 교육 정책이 됐다. 이후에는 국정교과서와 동일한 편찬기준으로 제작되고 있는 검정교과서의 향방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특히 이날 문 대통령이 “검정교과서 집필 시간 확보를 위해 2015교육과정 적용시기 변경을 위한 수정고시를 하라”고 지시한 만큼 내년 도입을 목표로 만들어지던 검정교과서 제작ㆍ적용 일정이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검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지난해 말 갑작스럽게 국ㆍ검정 혼용 방침을 결정하면서 개발 기간이 1년도 안 되는 ‘졸속 교과서’라는 우려를 받아왔다.
김태우 전국역사교사모임 대표는 “국정교과서 폐기는 시작이며 2015 교육과정 자체를 손봐 역사교육이 제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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