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기획재정부가 낸 ‘최근 경제동향’ 책자 한 구석에는, 기자들의 눈을 확 사로잡는 단어가 하나 등장했습니다. 최근 경제동향은 겉표지가 초록색이라 흔히 ‘그린북’이라 불리는 자료인데,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평가를 담은 책이라서 언론이나 시장 관계자들이 예의주시 하는 발간물입니다.
어쨌든 이번 달 그린북에서 주목을 받은 표현은 바로 ‘추경’이란 단어입니다. 추경은 추가경정예산의 줄임말이죠. 지난해 정부가 편성하고 국회에서 통과된 본예산과 별도로, 이미 회계연도가 시작한 뒤 국가의 수입ㆍ지출을 수정하는 예산을 말합니다.
이날 정부는 그린북을 통해 “추경 등 적극적 거시정책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활성화와 민생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명시했습니다. 언론들이 이 추경이란 단어에 주목한 이유는 정부(재정당국)가 지금까지는 추경안 편성의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해 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하기 전에 기자와 만났던 한 예산당국 관계자는 “지금 상황이 추경 편성 요건을 충족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추경이란 보통 정부가 빚을 내는 등 나라의 재정건전성 훼손을 감수하고 돈을 마련하는 것이라, 대통령이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편성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재정법 상 ▦전쟁이나 대규모 자연재해 ▦경기침체ㆍ대량실업ㆍ남북관계 급변 등과 같은 중대한 변화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해야 하는 지출 발생의 경우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지요? 경제위기 또는 위기사태에 준하는 정도의 상황이 되어야지 추경안을 편성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관계자가 추경에 부정적이었던 것도 바로 지금 경제상황이 그렇게 위기로 볼 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달리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라 곳간의 건전성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 재정당국의 소신은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추경안 편성을 공언해 왔습니다만, 앞서 본 것처럼 추경 요건에 ‘일자리 창출’이란 변수는 없으니 지금 상황을 추경 편성 요건으로 보기엔 어려운 게 맞습니다. ‘대량실업’이 비슷하지 않으냐 하겠지만, ‘일자리 창출’과 실업사태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지요. 법 조항에 나오는 용어는 매우 정확하고 보수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신은 새 대통령 취임 후 사흘 만에 무너졌습니다. 앞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달 말 “일자리 추경은 다음 정부의 몫”이란 전제는 달았지만 “추경 필요성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건 단 하나, 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결국 추경을 추진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자 소신을 꺾은 것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추경에 반대했던 안철수 후보나, 추경에 유보적이었던 홍준표 후보가 당선됐다면 어땠을까요? 기재부가 추경이란 말을 먼저 꺼내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입장을 바꿨으면서도, 재정당국은 별도 입장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린북 한 구석 문장에 ‘추경’이란 단어를 슬그머니 집어 넣었을 뿐입니다. 보통 추경이 있기까지는 경기를 살리려는 정치권의 가열찬 요구와 재정건전성을 지키려는 예산당국의 처절한 방어가 펼쳐지곤 했었는데, 이번엔 예산당국이 너무 빨리 백기를 들어버린 셈이죠.
개인적으론 추경을 하기는 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자존심 센 예산당국이 이렇게나 빨리 추경의 필요성을 인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공무원은 대통령 지시를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추경처럼 중요한 이슈를 맞아, 정부 내에서 그 필요성을 둘러싼 진지한 논의나 토론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참 아쉽습니다.
추경의 복선을 까는 일종의 ‘꼼수’도 발견됩니다. 지난달 그린북은 “그간 부진했던 소비도 반등하는 등 회복 조짐이 나타나는 모습”이라 했지만, 이 달 그린북에는 “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둔화가 지속되며 경기 회복세를 제약하는 모습”이라 밝혔습니다. 오히려 지난달에 비해 이 달의 상황이 나아진 것으로 평가 받는데, 표현은 뒤로 후퇴했지요? 경기가 좋으면 추경을 하기 어려우니, 일부러 어렵다는 표현을 담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대통령이 하라고 하니 해야죠.”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지요. 이해는 가는 얘기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질문 없는 청와대 브리핑에 기자들의 비판정신이 무뎌졌던 것처럼, 일방통행이 예사였던 지난 정권의 국정운용 행태가 이런 자포자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해 봅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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