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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운 양식

입력
2017.05.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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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 후배가 축하 모임 자리를 마련해 놓고 불렀다. 서울 대학로의 어느 카페에서 모였는데, 꽤 많은 축하객이 모여 있었다. 축하 순서 중에는 시 낭독도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는 후배가 나와서 내 시를 낭독하고는 말했다. “저는 아침마다 시 한편씩 읽고 나서 하루를 시작하죠. 밥은 더러 굶어도 시를 굶는 일은 없답니다.” 그날 나는 시를 사랑하는 후배의 얘기를 듣고 몹시 반갑고 부끄러웠다.

허균의 <한정록>에는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사람들이 스승으로 떠받들던 호장유란 사람은 기개가 우뚝하여 소신대로 살면서 가난한 살림에도 지조를 지켰다. 어느 날 조맹부란 사람이 호장유에게 은화 100냥을 가지고 와서 어떤 환관을 위하여 묘비명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자 호장유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어찌 환관을 위하여 묘비명을 짓겠는가? 썩 물러가게.” 그날 호장유의 집에는 먹을 양식이 떨어져 그 아들이며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 돈 받기를 권하였으나 호장유는 끝내 거절했다. 일찍이 호장유는 동양(動陽)으로 떠나가는 벗 채여우를 전송하는 글에서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옷도 따뜻하지 않으나, 시를 읊는 소리는 오히려 맑기만 하다”고 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나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운 양식이다.”

존재 자체가 온통 시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면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매사에 계산하고 효율만 따지는 산문적 인생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이리라. 삶의 행복은 끝없는 더하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에 함몰된 인생들은 그런 존재의 깊이를 가질 수 없으리라. 마트의 식품 코너 같은 데 산더미처럼 쌓인 것들만 먹을 양식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깜냥으로는 ‘비밀스런 양식’이란 말을 아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옷도 따뜻하지 않으나, 시를 읊는 소리는 오히려 맑기만 하다.”는 정신의 고상함을 아는 사람만이 그런 양식을 누릴 수 있다.

세속의 수행자 같은 시인 박노해는 천박한 세파에 진동한동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했다. “시가 흐르지 않는 것은/ 상대하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힘들어도 시심(詩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괴로워도 성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그렇게 내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부분)

여기서 ‘시가 흐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시인의 다른 작품 ‘불편과 고독’에 그 답이 있지 싶다. 편리에 길들여진 사람은 불편을 견디지 못한다. 삶이 경박해진 사람은 고독을 참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은 ‘홀로 외로움을 껴안으라’고, 불편과 고독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편과 고독을 추구하라’고 권면한다. 불편과 고독의 날개가 없이는 푸른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오늘 우리의 삶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변화무쌍하지만, 시가 흐르는 삶은 불편과 고독, 가난을 숙주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예나 이제나 시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시를 써도 발표할 지면이 줄어들었다. 한밤중에 시를 탈고하고 나면, 때로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후미진 산골짜기에 살면서 시의 청중을 만나긴 쉽지 않다. 아니다. 한밤중에 시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면 하늘엔 달님이 있고, 땅엔 반가워 꼬리 치는 개가 있다. 사랑스런 나의 청중들(^^^)이다. 어느 날 나는 탈고한 시를 개 앞에서 낭독해주었다. 내 시를 들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개가 꼬리치는 모습을 보며 ‘비밀스런 아름다운 양식’을 나눠준 것 같아 기뻤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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