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로드맵 靑이 모두 결정”
고위 관료들이 기업 생사 가르는
관치금융 탓에 구조조정 실패
카드수수료 인하ㆍ소액채권 탕감 등
소비자 손해로 이어질 가능성
“모두 해결하겠다는 발상 버려야”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해 “대우조선해양 정상화 방안은 모두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라며 “산은의 독립성이라는 건 없었다”고 밝히자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홍 회장 폭로를 계기로 서별관회의의 문제점이 공론화하면서 국회 청문회까지 열렸다. 정부가 밀실에서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연명시킨 대우조선은 이후 경쟁력을 회복했을까. 정부는 최근 2조9,000억원을 더 지원해야 한다며 추가 채무재조정을 벌였다. 업계에선 진작 퇴출돼야 할 대우조선이 존속하는 바람에 한국 조선업과 전체 시장이 더 어려워졌다고 호소하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어김 없이 시장의 자율성을 강화하겠다고 외치지만 정작 정부 정책은 거꾸로 가면서 시장의 불신을 자초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새 정부에선 시장의 원칙을 거스르는 관치금융이나 퍼주기식 선심성 정책, 무엇보다 시장을 윽박질러 가격을 잡겠다는 발상 등은 접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선업 구조조정 실패는 관치금융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2015년 10월 부실기업인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 지원을 막후에서 결정해 논란을 빚은 서별관회의는 경제부처 고위관료들이 주축이 된 비공개 협의체다. 비공개 협의체다 보니 의사결정 과정을 기록한 회의록도 없다. 정부부처 간 정책 결정 조율 창구라고 하지만 결국 경제 고위 관료 몇몇이 기업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경제 논리대신 정치 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 지금 구조 아래에선 관료와 정치인이 서로 기득권만 지키려고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 부실 기업을 털어내는 과감한 구조조정보다 정권 안정을 의식한 적당한 구조조정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산은이 지난 2013년 정치권과 정부 압박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STX조선에 3조원 넘는 돈을 쏟아부었지만 STX조선이 결국 지난해 5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 교수는 구조조정 영역에서 관치금융 싹을 자르려면 서별관회의가 대폭 투명해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의사결정의 근거 등을 남기도록 해야 관료들도 외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그의 제언이다. 물론 관료나 정치권 출신 낙하산을 정부가 주인인 기업에 투입하는 관행부터 없애는 게 순서다.
정부가 시장가격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식의 ‘반(反)시장적 정책’은 결국 정부의 신뢰만 갉아먹는다. 지난 3월 농식품부는 일부 업체의 치킨값 인상 소식에 “조류인플루엔자(AI)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가격을 인상하면 국세청 세무조사도 불사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BBQ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듯했지만 한달 뒤 다시 가격인상 계획을 발표했다. 인건비 등이 올라 8년 만의 가격인상이 불가피하다는 BBQ의 설명에 농식품부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인건비는 농식품부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무리하게 물가를 잡으려 했다는 비판만 쏟아졌다.
이명박 정부도 휘발유값을 잡겠다며 싼 기름을 파는 ‘알뜰주유소’를 2012년 선보인 바 있다. 업체엔 상당한 세제혜택을 줬다. 하지만 이후 국제 유가하락으로 일반 주유소 기름 값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정부 세금만 나간 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카드수수료 인하, 소액 연체채권 원금 100% 탕감 정책 역시 당장은 좋은 듯해도 여러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란 지적이 많다. 영세업자를 위한다는 취지로 수수료를 내리면 카드사들은 혜택을 줄이는 식으로 대응하고 결국 이는 일반 소비자 손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세업자들이 원하는 것은 카드수수료 인하가 아니라 경기 회복이란 조사도 있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결국 고용과 투자를 이끌어내는 건 시장”이라며 “큰 정부를 표방한다고 해서 모든 걸 정부 주도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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