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4월 20일. 오전 내내 기억을 더듬은 끝에 천황에게 편지를 썼다. 점심 먹고 우체국에 들러 계산에 따라 우편환으로 4,282엔을 만들어 편지와 함께 천황에게 부쳤다. 대일본제국 해군의 수병이자 전함 무사시의 생존자에서, 이제 스물 하나의 나이로 점령군 미군으로부터 시민권을 부여받아 일본시민이 된 와타나베 기요시는 천황에게 무슨 말이 하고팠을까.
와타나베는 열여섯에 해군에 자원입대한 뒤 ‘너가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은 천황 덕’이란 말을 귀 따갑게 들었다. 그래서 4년 여간 받은 월급 1,120엔 75센, 식비 1,410엔 30센, 천황의 하사품이라던 담배 1갑, 청주 2병 값 등을 모두 계산했다. 총액은 4,281엔 5센이었지만, 돈이 없어 4,000엔은 친척에게 빌려야 할 처지였지만, 1엔 더 얹어주고 치우기로 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 아니 선언은 이렇다. “나는, 이로써 당신에서 빚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0대 끓는 피의 치기인가. 그런 것 같진 않다. 문학을 배워 자기가 어쩌다 천황에게 속았는지 기록했다. 일본전몰학생기념회 사무국장으로서 ‘천황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러니까 빚진 건 오히려 당신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1945~46년에 쓴 일기를 모은 ‘산산조각난 신’(글항아리)은 그 ‘회심’의 기록이다.
와타나베는 1943년 6월 24일 전함 무사시를 찾은 천황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 “어쩐지 마을사무소에서 회계를 보던 다나카와 닮은 듯 하다”고 느꼈지만 그걸 입 밖에 낸 건 나중 일이다. 그 때만 해도 “이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속으로 흐느꼈다. 가끔 부사관들을 위해 줄을 대신 서주긴 했지만 위안부를 이용하진 않았다. 천황에게 바친 몸, “이대로 깨끗이 산화하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깨버린 건 조국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고, 용감하게 싸우다 죽으라고 등 떠밀던 자들의 추한 행태다. 맥아더와 천황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와타나베는 “원수로서 지닌 신성함과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적 앞에,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고 울부짖는다. 1944년 10월 24일 가라앉던 전함 무사시에서 천황의 어진영(御眞影)을 안전하게 모시려다 숱한 병사들이 죽어간 판에, 내 덕에 살았으니 나를 위해 죽으라던 천황은 저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일본 얘기니 그저 통쾌할 따름인가. 읽다 보면 우리 얼굴도 여럿 보인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