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인사’ 단골 착륙지… 금융권도 적폐 청산돼야
#. 지난 9일 대선이 끝나자마자 한 금융공기업은 정치권 인사로부터 특정 지역 출신 임원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공기업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그 지역 출신들의 임원 승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문재인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는 것 아니냐, 여당 인사와 친한 어느 임원이 뜰테니 미리 선을 대야 한다 등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권은 역대 정권마다 ‘낙하산 인사’의 단골 착륙지점으로 애용되는 곳이다. 억대 연봉에 책임도 무겁지 않은 ‘꽃보직’ 자리가 즐비한데다, 금융당국의 상시 감독을 받는 인가(라이선스) 사업이라는 특성상 정피아(정치권+마피아), 관피아(관료+마피아) 낙하산 투하에 조직적인 저항도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임직원들에게 실무 능력보다 줄대기ㆍ청탁문화를 우선시하게 만들며 결국 금융의 경쟁력까지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건 문재인정부야말로 금융분야의 대표적 적폐인 낙하산 인사부터 근절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아지는 이유다.
그간 금융권을 향한 낙하산은 공기업과 민간기업을 가리지 않아 왔다. 18일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 2008~2016년 사이 금융권 임원으로 온 낙하산 인사는 무려 1,004명에 달한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작년 9월 기준 금융공기업 임원 255명 중 97명(38%)이 낙하산이며, 이 가운데 53명은 여당이나 18대 대선 캠프 출신의 ‘정피아’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금융권 경력조차 없는 문외한들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을 지낸 조인근씨가 청와대를 나온 뒤 작년 8월 한국증권금융 감사에 선임된 것은 ‘청와대 출신 자리 만들기’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밖에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예금보험공사와 주택금융공사 등 공기업 임원들 중에도 대선 캠프, 청와대 출신 등 금융 비전문가가 수두룩하다.
심지어 정부 지분이 한 주도 없는 민간 금융사에까지 낙하산 폐해는 심각하다. 국내 최대 규모 금융그룹인 KB금융지주는 지난해에도 박근혜 정부 실세인 모 인사가 국민은행장으로 온다, 청와대 출신이 감사로 온다는 등의 정치권발 리스크로 곤욕을 치렀다. 앞서 이명박 정부 시절 이른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 인사’로 꼽혔던 어윤대 전 회장이 임명된 데 이어, 2014년 당시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이 정면 충돌했던 ‘KB사태’ 역시 낙하산 인사의 후유증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민영화 이전 우리은행은 금융당국 간부로부터 “인사 청탁이 제일 많은 곳”이란 말을 공공연히 들을 만큼 대표적인 낙하산 타깃이었는데, 여전히 정부 지분이 일부 남아 있어 “앞으로도 완전히 낙하산 리스크가 없을 거란 장담은 못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적폐문화를 청산하려면 무엇보다 여당, 대선 캠프 인사들의 ‘논공행상’ 요구에 확실히 선을 긋고 명확한 인사 원칙을 선제적으로 알려 낙하산 시도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윤석헌 서울대 객원교수(금융학부)는 “(정부 정책을 지원할 금융공기업까지)낙하산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금융권 인사에서도 ‘이런 조건의 사람은 절대 안 된다’는 네가티브 방식의 원칙을 공고히 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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