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람들 오가던 자하문 고갯길
서울 도심 내려다 보이는 좋은 전망
숲 우거지고 바위도 많아 정취 가득
서촌 중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하문 고개가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의 거친 바위길이 갑자기 아래로 꺼지면서 만나는 이 고개는 고려 때부터 사람들이 걸어 오가던 나름의 교통 요지였다. 그 중 고개 안 쪽 청운동 일대는 비록 도로가 나고 주택이 들어서 많이 번잡해졌지만 아직 나무가 많고 숲이 짙은 데다 인왕산과 북악산의 힘찬 바위까지 있어 정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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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인 이름 딴 언덕과 문학관
자하문 고개에서 가장 먼저 들를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언덕에 오르면 전망이 사방으로 다 좋은데, 그 중에서도 해가 진 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도심 야경과 한양도성 성곽 너머 북한산 비봉 능선의 실루엣이 특히 좋다. 서울 시내에서 이 정도로 조망이 시원하고 상쾌한 곳도 드물다. 언덕에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가 바위가 새겨져 있고 겸재 정선의 ‘장안연우’(長安煙雨)를 새긴 안내판이 서있다.
그러나 이곳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고 한 것을 두고는 말이 많다. 시인이 젊은 시절 문우 정병욱과 함께 인근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고 가끔 인왕산을 올랐다고는 하나 이 언덕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없는 만큼 시인의 이름을 붙인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언덕 바로 아래 윤동주 문학관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로 엉뚱하다 할 만하다. 하지만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시인이 근처 동네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그의 삶과 문학을 알리겠다는 시도를 계속 탓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미 이름이 굳어진 마당이니 이 정도로 비판을 멈추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이 만주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 그런 만큼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행사가 많다. 윤동주는 흔히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법대나 의대 진학을 기대한 부친과 대립한 끝에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 것을 보면 주관과 고집이 강했던 것 같다. 장준하, 문익환, 정일권 등 어릴 적 친구 중에는 훗날 이름을 남긴 이들이 여럿 있다. 이 네 사람이 교복을 입고 학생모를 쓴 채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된 적도 있다.
문학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무 우물이다. 만주 명동의 생가에서 우물 윗부분 목판을 가져와 실내에 복원한 것이다. 돌이나 시멘트가 아니라 나무로 된 우물은 드문 편인데 옛날 부잣집에서는 더러 목판 우물을 두었다고 한다. 우물은 이 전시관의 핵심 테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 봅니다”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읽으면 그가 우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성찰하고 고민했을 것 같다.
● 1ㆍ21 사태의 두 희생자
문학관 건너편 창의문 입구에는 1968년 1월 21일 침투한 북한 124부대원과 맞서다 숨진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두 사람은 당시 124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당도했을 때 총격전을 벌이다 숨졌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의 강경 대치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그러나 함께 목숨을 잃었는데도 최규식 서장을 위해서는 큰 동상을 세우고 정종수 경사를 위해서는 순직비만 세운 것은 불공평하게 보인다. 생전의 두 사람은 계급이 달랐지만 같이 목숨을 잃은 만큼 동상을 세우든 순직비를 세우든 사후에는 같이 대접해야 옳지 않을까.
다시 찻길을 건너 윤동주 문학관을 오른쪽으로 끼고 걸어가면 청운문학도서관이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숲 속에 있고 도심이 환히 보이는 데다 한옥으로 지어져 분위기가 좋고 한적하다. 한옥 방 바닥에 앉아 앉은뱅이 책상에서 편히 책을 읽을 수 있게 한 것도 좋다.
● 쓸쓸한 백운동천, 김가진의 집터
도서관에서 이국적인 외양의 빌라를 스쳐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자하문 터널 방향으로 꺾어진다. 터널로 들어가지 말고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건물을 향해 올라간 다음 터널 위 숲으로 들어가면 아카시아가 무성하다. 사람이라고는 다니지 않는 짙은 숲이지만 약간은 어수선한 그곳에 집터가 보인다. 그 뒤 바위에는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원래 경치 좋은 곳을 동천이라고 했는데 이 일대에는 백운동천 말고도 백석동천(白石洞天), 청계동천(淸溪洞天), 그리고 청와대 경내에 있어 일반인이 볼 수 없는 도화동천(桃花洞天)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만큼 이 동네가 예부터 절경이었다는 뜻이리라.
이 숲의 주인공인 김가진(1846~1922)은 김상용의 12대 손이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시조를 남기고 끌려간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과 마찬가지로 당시 그의 형 김상용 또한 빈궁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폭해 조선 왕실로부터 충절을 인정받았다. 당시의 왕실과 형제의 친명반청 인식을 두고 비판이 있지만 어쨌든 이 일로 형제의 본관인 안동 김씨는 세도정치를 본격화했다. 형제와 후손들은 큰 권세를 누리며 이곳 서촌에서 수대에 걸쳐 살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김가진은 안동 김씨의 위세가 꺾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선조들만큼 권세를 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김가진의 삶은 당시 권력가와 그 후손 대부분이 친일파로 변신해 영달을 누린 것과 대비된다. 서촌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더 없이 좋은 안내서인 ‘오래된 서울’에 따르면 그는 대한제국의 장관급 이상 고위인사 중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아들을 데리고 상해로 망명했는데 이 때 나이가 만 일흔 셋이었다. 본격 항일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던지 그는 망명 3년 만에 이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망명 전 백운동천 부근 1만평 정도가 그의 권역이었다. 그러나 집안 일을 맡아보던 집사가 몰래 동양척식회사에 저당을 잡히고 해방 후에는 후기성도교회에 불하되면서 소유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그 결과 그렇게 멋있었다는 숲 속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낯선 건물 바닥만 지저분하게 남아 쓸쓸하게 보인다. 무성한 숲 사이로 물길이 나있다. 물은 흐르지 않지만 물길이 제법 큰 것으로 보아 청계천으로 흘러 드는 지천 중 하나가 이곳에서 발원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겠다.
● 소나무 우거진 경기상고의 청송당 자리
발걸음을 왔던 곳으로 돌려 경기상업고등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아까 청운문학도서관에서 내려왔던 길이 왼쪽으로 보인다.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왕복 2차로 도로지만 실은 고려시대에도 있던 길이다. 여기서 청운벽산빌리지를 지나 앞서 언급했던 자하문 고개를 거쳐 창의문과 세검정 쪽으로 난 길을 지나면 파주를 거쳐 결국에는 개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때는 좁은 흙 길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이면도로의 이력이 이 정도라니 놀랍기만 하다.
경기상고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테니스장에서 울리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운동장에 들어선 다음 본관으로 고개를 돌리면 적송 수십 그루가 보인다. 인근 경복고가 그런 것처럼 경기상고 역시 꽃과 나무가 많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놀고 있다. 학교 깊숙한 곳 바위에는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청송은 푸른 소나무(靑松)가 아니라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 들리는 집’ 정도 된다. 조광조의 제자인 성수침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두문불출하면서 공부에 전념하던 독서당이라고 한다. 근처에서 살았던 정선의 그림에는 청송당이 소나무 가득한 산 중의 기와 건물로 나온다. 그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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