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5.26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의 전선은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반격, 12월 중국인민해방군 참전과 1.4후퇴, 유엔군의 재반격을 거치며 이듬해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될 무렵에는 지금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사실상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53년 7월까지 2년 간의 전투가 이른바 ‘제한전(制限戰)’이다. 양측 모두 전황의 반전의지 없이 대치하는 소강전. 하지만 후방에서는 마을 하나를 두고 국군과 잔류 인민군(공비)이 공방을 벌이면서 숱한 민간인들이 희생됐고, 전선에서는 또 고지 하나를 두고 탈환과 재탈환의 백병전으로 숱한 군인들이 죽어 나갔다.
휴전 협상의 걸림돌은 막판까지 진통을 겪은 포로교환문제 등도 있었지만,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완강한 휴전 반대도 큰 변수였다. 그는 ‘북진 통일’을 요구하며 유엔군사령부의 수 차례 휴전 제안을 거부했고, 재집권을 위해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을 획책했다.
48년 취임한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4년 임기 만료가 가까워지면서 연임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국민방위군 사건’ 등 거듭된 부패와 실정으로 의회 신임을 잃은 그는 제헌헌법이 정한 의회 간선제로는 연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다수당인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은 50년 2월과 52년 4월 2차례나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 터였다. 한국전쟁 직전 치러진 50년 5.30 총선 결과 무소속 의원이 무려 60%나 당선됐다.
불안해진 이승만이 꺼내든 안이 대통령 직선제였다. 그는 개헌을 위해 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ㆍ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 26일 헌병대를 동원해 내각제 주도 국회의원 48명을 연행하고 일부에게 국제공산주의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사조직과 다름 없는 정치폭력배를 동원해 신문사를 습격하고, 야권의 호헌 집회를 무산시켰고, 대대적인 관제 데모를 조직했다.
그리고 7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이 포위한 국회의사당에서 구속 후 회유한 의원들까지 보석 명목을 참석시켜 기립 거수표결 방식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국무원불신임제를 짜깁기한 개정헌법은 출석 166명에 찬성 163명(기권 3명)이었다. 사흘 뒤인 7월 17일 개정헌법이 공포됐고,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됐고, 한 달 뒤인 8월 대선에서 이승만이 당선됐다. 독재와 장기집권의 시작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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