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1조 등 안전수칙은 지키지만
15시간 밤샘근무 열악한 처우 여전
50세 돼도 월 300만원도 못 받아
미래 암담해 줄줄이 퇴사해요”
“빨리 시작하자.”
21일 일요일 오후 11시50분. 서울지하철2호선 당산역에 열차운행 종료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자, 헬멧을 눌러 쓴 두 사내가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양 손엔 작업장비가 든 가방과 접이식 사다리가 걸음마다 출렁였다.
이들은 지난해 5월 28일 구의역에서 홀로 정비작업을 하다 스크린도어와 전동차 사이에 끼어 숨진 김모군과 같은 일을 하는 서울메트로 PSD(Platform Screen Door) 정비원 정지용(32) 정희라(23)씨. 이날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30분까지 15시간가량 책정된 야간 작업 도중이었다.
이번 근무엔 총 3건의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4호선 남태령역→2호선 당산역→4호선 사당역 순이다. 오전 9시~오후 6시 주간 근무자가 퇴근한 후 신고된 고장 수리나, 오랜 시간이 필요해 열차운행이 끝난 뒤로 미뤄진 정비작업이 이들 몫이었다. “다행히 남태령역 정비가 생각보다 간단했다”는 희라씨는 “첫차 운행시간 전까지 남은 작업을 모두 마무리해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밤을 꼬박 새는 장시간 노동인데도 역과 역을 오가는 2시간 가량 이동시간마저 빠듯한 실정이었다.
두 사람이 멈춰선 내선순환 승강장 9-2번 칸 스크린도어엔 두 개의 붉은 경광봉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이 있는 위치’란 뜻. 다가온 역무원이 “오후 2시47분부터 레이저스캐너(센서의 일종)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상’을 설명하자, 곧바로 작업이 시작됐다. 7년 차 정비원인 지용씨는 “레이저스캐너 고장은 열차 출입문 끼임 사고를 부를 수 있다”며 꼼꼼히 센서를 수리한 뒤, 틈새의 먼지까지 깨끗이 닦아냈다. 희라씨는 "오늘 작업은 그나마 승강장 쪽에서만 해도 돼 크게 위험하지 않지만 (레이저스캐너가 아닌) 적외선 센서가 탑재된 스크린도어 정비 때는 선로 쪽에서 작업해야 해 상대적으로 위험하다“고 했다. 선로 쪽 작업은 다른 작업차량이 오는지를 선로에 서서 ‘망’을 봐야 하고, 차량이 오면 재빠르게 승강장 아래 빈 공간으로 몸을 피하는 일이 반복된다. 잠깐의 방심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쉴 틈도 없이 작업했지만 정비시간은 길어졌다. 당초 예상했던 오전 1시를 훌쩍 넘긴 1시 50분. 지용씨는 “그만큼 휴식은 줄고, 작업시간도 쫓기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 곳의 작업을 마칠 때마다 담배 한 대씩 태우며 피로를 달래고는 하지만, 이날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요기라도 할 시간은 애초 없었다. 1년 전 숨진 김군 가방에서 미처 먹지 못한, 뜯지 못한 컵라면이 발견된 것처럼.
김군이 세상을 떠난 1년 전과 달라진 게 있을까. 작업 중엔 도무지 틈이 없어 사당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물었다. 지용씨는 “안전수칙만큼은 철저히 지킨다”면서도 “다만 빡빡한 근무 여건과 열악한 처우는 변한 게 없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사고 이후 서울메트로는 안전업무 직영화, 2인1조 근무원칙 준수 등 사고 재발 방지대책을 내놨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실질적 근로 여건이나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다는 얘기였다.
실제 서울메트로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직영화 선언 이후 고용승계와 신규채용을 통해 입사한 약 200명의 PSD정비원들은 모두 무기계약직인 ‘안전업무직’으로 분류돼있다. 희라씨는 “기관사 같은 정규직은 하루 주야간 2교대 근무를 4개조가 돌아가면서 하는데, 우리는 3개조가 근무를 하고 있다”고 푸념했다. 게다가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121개역을 4곳의 PSD관리소가 담당, 1곳당 30개역 이상을 맡아야 한다. 관리소와 멀리 떨어진 역에서 사고가 나면, 이동하는 데만 40분이 걸릴 때도 있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지하철노조 관계자는 “4조 2교대 근무를 하려면 최소 2곳의 관리소를 추가 설치하고, 인원도 234명 수준까지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더 암담한 건 미래다. 초봉으로 매달 170만~180만원을 받고 있는데, 연봉 상승폭을 생각하면 “우울하다”고 했다. 희라씨는 “아마 50세가 돼도 월 300만원도 못 받을 것”이라며 “최근 반 년 사이 10명 가까이 퇴사했다”고 했다.
오전 4시 즈음, 사당역 작업을 마치고 지용씨가 ‘작업 종료’를 선언하자 긴장했던 희라씨 표정에 안도감이 돌았다. 지용씨는 끝으로 “김군의 희생을 기억해주셔서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고 한 마디를 던졌다. “김군 사망 이전에도 작업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어요. 사고가 터져야 부랴부랴 제도를 바꾸고 대책을 마련하는 사회구조는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희라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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