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종종 음식의 무덤이 되곤 한다. 꽉 찬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면 오래 전 처박아둔 식재료가 튀어 나온다. 먹자니 찜찜해서 아깝지만 버린다. 시간 들여 장 보고 전기 돌려 보관해서 기껏 쓰레기를 만든 셈이다. 그로 인한 쓰레기 처리 비용과 환경 파괴는 별도다. 굶주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면 안 되지 반성하는 것도 잠시, 또 쓰레기가 될 망정 잔뜩 사다 냉장고에 넣고 본다. 하지만 냉장고는 만능이 아니다. 냉장고에 넣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토마토가 대표적이다. 토마토는 10도 이하에 두면 맛과 영양이 떨어진다. 보통 1~4도에 맞춰져 있는 냉장고를 좋아할 리 없다. 열대과일은 물론이고 가지, 오이, 호박, 감자, 아스파라거스도 냉장고에 들어가면 고생한다. 냉방병에 걸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속은 골골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냉장고 덕분에 생활이 편해지긴 했지만 더 잘 먹게 됐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류지현씨는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는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음식 낭비를 막고 음식이 맛과 영양을 잃지 않도록 보관하자는 제안이다. 2009년 네덜란드의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에서 석사 졸업 작품으로 ‘지식의 선반’을 선보이면서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야채, 과일, 양념을 각각의 특성에 맞게 실온에 보관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이 나무 선반은 세계적 관심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프로젝트는 TED 강연과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다룬 독일 다큐멘터리 ‘쓰레기 맛을 좀 봐’에도 소개됐다.
그가 쓴 ‘사람의 부엌’(낮은산 발행)은 냉장고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이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오래된 지혜를 찾아 3년 간 유럽과 남미 곳곳의 부엌과 텃밭, 농장, 공동체를 순례하며 찾아낸 전통지식과 삶의 자세, 오늘의 식탁과 음식문화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면서 편안하게 풀어냈다.
“지금은 냉장고 없이 못 살 것 같지만 인류 역사에 냉장고가 등장한 건 100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1910년대 미국에서 처음 나왔고 한국산 첫 제품은 1965년 생산됐죠. 그런데 냉장고가 과연 식재료를 보관하는 최선의 방법일까요? 어느 날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 버려진 쇠고기를 보고 그런 의문이 들어 프로젝트를 하게 됐죠. 조사를 하다 보니 냉장고에 의존하는 삶은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됐어요. 쓰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현명하게 사용하자는 거죠. 냉장고의 리듬대로 돌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체인 삶, ‘냉장고의 부엌’이 아니라 ‘사람의 부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리적이고 현명한 소비를 제안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냉장고나 식품 보관에 대한 지식보다 음식과 자연, 삶을 대하는 태도다. 내가 먹는 식재료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임을, 많은 사람의 손길과 자연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임을 알고 귀하게 다루는 것이야말로 자연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예의이자 내 삶을 존중하는 자세임을 환기시킨다.
여행에서 그가 만난 것도 지식보다 사람이었고 삶이었다. 전통지식을 이용해 살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농부들은 기술만능주의와 냉장고가 차단해 버린 자연과 리듬과 삶의 감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오래된 미래를 발견했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보았다. 도랑을 이용해 창고를 천연냉장고로 활용하고, 9월에 수확한 포도를 숯 넣은 물병에 꽂아 이듬해 봄까지 싱싱하게 보관하고, 차가운 냇물에 감자를 얼렸다 밟고 말리고를 반복해 2~3년을 거뜬히 보관하는 등 자연으로부터 얻은 오래된 지혜가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그는 이 귀한 유산을 복원하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사용하면서 음식과 사람의 거리가 멀어졌다. 눈으로 바로 보고 느끼던 것이 냉장고 안에 갇혀 버렸다. 음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자연에 대한 감각도 가난해졌다.
냉장고 없는 부엌 찾아 유럽 남미 여행 3년
자연의 힘으로 음식 보관하는 전통지식에서
지속 가능한 삶과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다
냉장고의 부엌을 사람의 부엌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보자’고 말한다.
“시작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죠. 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채소나 과일이 냉장고 밖에서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는 것을요. 강한 생명력에 깜짝 놀랄 거에요. 양배추는 잎이 물에 닿지 않도록 밑동만 살짝 물에 담아 보관하면 2~3개월까지 가요. 겉잎은 시들어도 속은 싱싱하죠. 심지어 새 잎이 돋는 걸 보면서 식재료도 하나의 생명임을 실감하게 돼요. 사과와 감자는 함께 보관하면 좋아요. 사과의 에틸렌 가스는 채소나 과일의 성장을 촉진하는 물질이지만 신기하게도 감자에는 거꾸로 작용해 노화를 늦춰 주거든요. 당근 같은 뿌리채소는 모래에 꽂아 두면 좋고요. 위로 자라는 것이라 눕혀 두면 서려고 에너지를 쓰느라 오래 못 가거든요.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른 채소와 과일을 각각의 성질에 맞게 그릇이나 선반에 보관하면 부엌과 식탁을 에쁘게 꾸밀 수도 있죠. 그렇게 하나씩 늘려가다 보면 냉장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죠. 그리 어렵거나 불편하지도 않아요. 일단 시작해 보세요.”
그의 제안과 프로젝트는 당신의 냉장고는, 부엌은, 삶은 안녕하신지 묻는다. 일상 공간인 부엌에서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냉장고가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실험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안녕한지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저는 얼마나 건강한 음식인지, 나아가 지구에 좋은지, 이 둘이면 충분하다고 봐요. 기업이 지구에도 건강한 먹거리 생산과 유통을 위해 효율성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이른 것 같아요. 그래서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죠. 소비자 인식도 바뀌어야 하고요. 전통은 고정된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식재료를 보관하는 현대의 전통은 냉장고이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이 모여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고 생활 습관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우리가 생명이듯 식재료도 하나의 생명이니 존중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거 같아요. 냉장고에 전부 집어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작은 냉장고를 쓰게 됐고요. 자투리 채소를 잘 안 남기게 됐고 남은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요리를 하기도 해요. 계몽을 하려고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것을 제 방식대로 디자이너로서 실천한 것뿐인데, 반응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죠. 친구들이 이 프로젝트는 이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 같다고 말해요. 제가 잊고 있어도 알아서 굴러간다는 거죠.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꾸준히 오래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냉장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그의 제안은 식품의 유통 방식이나 음식 문화의 다양성과도 연결돼 있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구해 내자’는 이동식 전시를 하기도 했다. 속도와 효율을 앞세우는 대량 유통 방식에 맞지 않아 사라져가는 식재료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지식의 선반’으로 선보였던, 식재료 보관의 지혜를 구현한 디자인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준비하는 한편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 가는 다음 여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을 답사할 계획이다. 식재료를 보관하는 지식을 공유하는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내온 지식을 맞는지 확인해 소개한다.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에 살고 있는 그는 이탈리아인 남편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책 출간에 맞춰 귀국, 책을 알리느라 바쁘게 지냈다. 30일 이탈리아로 돌아갔다가 올 가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때 다시 올 예정이다. 전시 작가로 초대를 받았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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