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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히든 히어로] “유니폼ㆍ속옷 취향 척척… 라커룸에서는 나도 국가대표”

입력
2017.06.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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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0 월드컵 신태용호의 장비를 책임졌던 한동근 대한축구협회 경기지원팀 사원. 그가 지난 7일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 장비실에서 유니폼과 골키퍼 장갑을 챙기며 활짝 웃고 있다.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U-20 월드컵 신태용호의 장비를 책임졌던 한동근 대한축구협회 경기지원팀 사원. 그가 지난 7일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 장비실에서 유니폼과 골키퍼 장갑을 챙기며 활짝 웃고 있다.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전반전 끝나면 대부분 선수들이 유니폼 상의만 바꿔 입거든요. 하지만 정태욱(20ㆍ아주대)과 이유현(20ㆍ전남)은 하의까지 싹 다 갈아입어요. 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땀이 흥건하거든요.”

“이승우(19ㆍ바르셀로나후베닐A)와 하승운(19ㆍ연세대)은 꼭 축구스타킹을 한 번 갈아 신죠.”

“여름이라 모든 선수가 민소매 언더셔츠를 입는데 유일하게 임민혁(20ㆍ서울)에게는 긴 소매를 챙겨줘야 합니다.”

선수들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훤히 꿰고 있는 이 사람은 U-20 월드컵 기간 동안 신태용호의 장비 담당 스태프로 일한 대한축구협회 경기지원팀 한동근(29) 사원이다. 대표팀 지원 스태프 중에서도 장비 업무는 가장 허드렛일로 통한다. 수십, 수백 벌의 유니폼과 훈련복, 각종 훈련 도구를 챙기다 보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지난 7일 한 씨를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만났다.

경기 직전 라커룸의 모습. 한동근 씨가 정성스럽게 세팅한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동근씨 제공
경기 직전 라커룸의 모습. 한동근 씨가 정성스럽게 세팅한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동근씨 제공

경기 당일 한 씨는 선수 21명의 메인 유니폼 3벌과 서브 유니폼 1벌 등 80벌이 넘는 유니폼을 들고 가장 먼저 경기장으로 간다. 하프타임 때 선수들이 유니폼을 갈아입기 때문에 2벌을 라커룸에 비치하고 여분 1벌은 따로 보관한다. 경기 당일 유니폼 색깔이 갑자기 바뀔 수 있어 서브 유니폼도 반드시 1벌 챙긴다. 베스트11 선수들의 유니폼을 각자 자리에 놓을 때는 온갖 정성을 들인다. 차례상의 ‘홍동백서’처럼 골키퍼부터 왼쪽 수비수, 미드필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른쪽 공격수 순서대로 유니폼을 건다. 한국이 이번 대회에서 치른 4경기 모두 이 순서를 꼭 지켰다. 그는 “기니와 1차전 때 3-0으로 완승하니 그날과 똑 같이 하게 되더라.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루틴(선수가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하는 습관적인 행동이나 반응)’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경기종료 후 땀에 젖은 유니폼을 걷어 호텔로 와 지정 세탁 업체에 맡긴 뒤 곧바로 다음 날 오전 훈련 때 선수들이 입을 트레이닝 복을 사이즈별로 정리한다. 오후 8시 경기가 있으면 그가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시간이 새벽 2시다. 잠깐 눈을 붙이고 해뜨기 전에 일어나 배달된 세탁물을 분류한다. 유니폼은 등 번호가 표시돼 있고 훈련복은 사이즈 별로 나누면 되니 큰 문제가 없는데 속옷 등 개인 물품을 다룰 때는 신경이 곤두선다. 대회 기간 백승호(20ㆍ바르셀로나B)의 속옷만 두 번이나 없어져 애를 태웠다. 자칫 선수가 예민하게 반응할 까봐 전전긍긍했는데 오히려 백승호는 “형,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라며 한 씨를 위로해 줬다.

FIFA에서 제공한 기계를 통해 대회 로고와 페어플레이 캠페인 패치(덧대는 헝겊 조각)를 유니폼에 붙이는 모습. 하루 밤을 꼬박 새 100벌이 넘는 유니폼에 패치를 다 붙였다. 한동근 씨 제공
FIFA에서 제공한 기계를 통해 대회 로고와 페어플레이 캠페인 패치(덧대는 헝겊 조각)를 유니폼에 붙이는 모습. 하루 밤을 꼬박 새 100벌이 넘는 유니폼에 패치를 다 붙였다. 한동근 씨 제공

대회 개막을 며칠 앞두고는 밤을 꼬박 샜다. 월드컵의 경우 유니폼 좌우 어깨 부근에 대회 로고와 페어플레이 캠페인 패치(덧대는 헝겊 조각)를 반드시 붙여야 한다. FIFA에서 제공한 기계를 이용해 수작업으로 100벌이 넘는 유니폼에 패치를 달았다.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꼬박 붙였는데 절반도 못 했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다시 반나절 이상 매달려서 오후 3시경 겨우 끝냈다.

한 씨도 한 때 태극마크를 꿈꾸던 축구 선수였다. 188cm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그는 중앙수비수 출신이다. 중대부고 시절 주장을 맡아 인천광역시 대회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 수비상을 받을 정도로 기량도 인정받았다. 한 씨는 “기술은 조금 떨어졌지만 몸싸움을 피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동료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있어 학창시절에는 늘 주전으로 뛰었던 것 같다”고 했다. 중앙대에 입학한 뒤 한 씨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목표로 잡았다. 오래 전부터 첼시의 팬이었다는 그는 “몇 년 지나면 첼시에서 존 테리(37ㆍ첼시 출신의 잉글랜드 대표 수비수)랑 호흡을 맞출 줄 알았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시련이 찾아왔다. 신입생으로 입학한 1년 후배 김신욱(29ㆍ전북)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겼다. 지금은 국가대표 공격수인 김신욱은 대학 때 중앙수비를 맡았다. 2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3년 내리 벤치를 지키고 나서야 프로 선수가 되기 힘들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한 씨는 스포츠 행정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모교 대학원 문을 두드렸다. 담당 교수는 그가 대학원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영어부터 마스터하고 오라”고 했다. 한 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조교로 일하고 새벽반과 야간반, 하루 두 번 영어 학원을 갔다. 하루 3시간씩 자며 3개월을 독하게 버텼더니 그제야 영어가 조금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교수는 “제대로 공부 한 번 해 보라”며 격려해줬다. 1년 반을 ‘주경야독’ 한 끝에 영어를 마스터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2015년 말과 2016년 1월,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와 축구협회가 신입 직원을 공개 모집할 때 동시에 응모해 둘 다 합격했고 축구협회를 택했다. 한 씨는 알파벳도 잘 모르던 자신이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졌던, 고통과 보람이 교차한 1년 반의 시간을 자기소개서에 진솔하게 적었다고 한다.

U-20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축구협회는 선수 부모를 NFC에 초대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한 씨는 그 모습을 보며 헌신적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부모를 떠올렸다. ‘저 자리에 오셨다면 얼마나 뿌듯해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리고 선수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는 “아버지께 전화 드리니 ‘선수로 못 뛴 월드컵, 스태프로 함께 했으니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하시더라”고 밝게 웃었다. 이제 다시 경기지원 팀으로 복귀하는 한 씨는 “U-20 선수들과 함께 한 시간을 내 인생에 큰 자산으로 삼을 것”이라 다짐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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