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계성여고생 김현숙씨
“점심 굶고 시위대에 도시락 건네
폭력 없이 세상 바꾼 역사 소중”
-넥타이 부대 주도 김국진씨
“직장인들 점심시간 성당 앞 시위
경찰에 최루탄 따지고 경적시위도”
30년 전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대학생과 재야운동가 등 시위대가 피운 민주화라는 모닥불이 전국적인 불길로 이어진 데는, 성당 주변 곳곳서 ‘한 몫’을 해 준 시민들 힘도 컸다.
당시 명동성당과 맞닿은 계성여고 2학년생이던 김현숙(47)씨는 집에서 싸온 점심 도시락을 시위대에게 건네주면서 귀중한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도운 인물이다. 9일 만난 현숙씨는 “한창 호기심 많을 열일곱 소녀에겐 등·하굣길에 늘어선 전경들이며, 성당에서 시위하던 대학생 오빠·언니들 모두 바라만 봐도 설렌 존재였다”고 했다.
여고생 현숙씨의 호기심은 ‘금지된 곳’으로 더 끌렸다. “최루탄이 위험하니 성당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학교 지시가 있었지만, 그의 발길은 등하굣길을 지켜주는 전경 쪽보다 자연스레 성당 시위대 쪽으로 향했다. 현숙씨는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영상을 시위대의 어깨너머로 봤는데, 세상엔 내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일들이 참 많구나 느꼈다”고 했다.
경찰의 명동성당 원천봉쇄로 시위대들이 물도, 밥도 끊겼다는 소식에 현숙씨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은 집에서 들고 온 도시락은 물론, 언니들을 위해 생리대를 선뜻 건넸다. 시위대는 그런 그들을 고마워하면서도, 성당에서 빨리 내보내려고 애썼단다. 경찰에 한 번 잡혀가면 어떻게 될 지 몰랐던 때니, 시위대 입장에선 천진한 여고생이 성당에 기웃거리는 게 아찔했을 거란 게 현숙씨 얘기다.
성당 옆 여고에 ‘도시락 부대’가 있었다면, 명동일대 거리엔 ‘넥타이 부대’가 있었다. 넥타이부대를 주도했던 김국진(66) 당시 대한보증보험공사 노조위원장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서머타임(일광시간 절약제)’을 시행해 오후 5시면 직장인들이 모두 퇴근하던 때라 시위에 합류하기 참 좋은 조건이었다”고 했다.
가장 또렷한 순간은 6월 13일 점심시간. 밥을 먹지 않고 명동성당 주변에 서성이던 수많은 직장인들 한 가운데서 당시 외환은행 노조의 전재주(61)씨가 주저앉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넥타이 부대가 성당 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그러곤 다 같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시위 지도부도, 폭력도 없었으니 경찰도 제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시위 이후, 그때까지 침묵했던 시민들의 참여도 늘어 그 세가 상당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넥타이 부대의 무기는 노련함과 배짱, 그리고 두둑한 지갑이었다. “시위 학생들과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를 외치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인도로 올라가 ‘왜 시민들한테 쏘냐, 쏘지 마!’하고 따졌죠. 손가락질하고 항의하고 말리면서, 시위를 돕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었어요.” 출퇴근길에는 명동성당 시위대에 돈을 전하는 직장인도 많았단다. 운전자들이 종로와 을지로 등 도심을 달리며 벌인 ‘경적시위’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은 “6월 민주항쟁의 가장 큰 동력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평화시위였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국정농단 사태 때의 촛불시위를 보면서 그 때를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혜숙씨는 “민주주의 본질이 훼손됐을 때, 국민들은 또다시 나서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며 “무엇보다 폭력 없이, 국민들의 뜻을 모아 세상을 바꿔갔기에 30년 전 그날의 역사가 더 소중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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