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열이한테 할 말? 없어… 지금 걔가 잘 지내는지, 하늘에서 제 아버지를 만났는지 그것도 모르거든. 알고 싶은디 꿈에도 안뵈니까 묻지도 못하겄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던 순간에도 ‘엄마’를 찾는 대신 “내일 시청에 가야 한다”고 외쳤던 야속한 아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뭐가 그리 분주한 지 엄마의 꿈에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아들과 함께 살던 50년 된 전남 광주의 낡은 집에 남아있다. 이사를 가면 아들이 혹여 길을 잃을 것 같아서다.
지난 3일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가 있는 서울 동대문구 한울삶에서 만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77)씨는 지난 30년간 “세월에 끌려가듯 살았다”고 말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유가협의 다른 부모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민주화 시위ㆍ집회를 다녔고 아들을 대신해 ‘민주투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배씨는 그저 “혼자가 아니고 싶어서, 이곳저곳 뛰어다니다 보면 한열이와 같이 있는 것 같아서 한 일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어째 내 아들이 죽었는데 왜 엄마아빠 마음대로 못하나”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스무살에 두메산골 출신 청년 고 이병섭씨와 결혼한 배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는 것이 낙이었고 그저 식구들이 건강하고 성실하게 잘 살아주는 것이 바람이었다.
1987년 6월 9일,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뒤 배씨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한열이가 연세대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을 맞아 쓰러졌다는 끔찍한 소식에 가족들은 허겁지겁 서울로 달려갔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27일간 꼬박 날밤을 샜지만 7월 5일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손을 놓아줘야 했다.
배씨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장례 과정도 의문이었다. “한열이 아버지가 한열이를 연세대 뒷산에다 묻어놓고 가자는 거에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한열이가 교문밖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대. 그 소리를 듣고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어져 버렸어요.”
죽은 아들의 장지를 부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었다. 그래도 배씨는 보고 싶을 때마다 묘지 옆에 앉아 있으려면 아들을 반드시 광주에 묻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배씨는 “한열이를 당신네들이 못 보내주면 그냥 이고라도 가버릴 란다” 라며 나섰다. 결국 그는 아들을 가까운데 묻었지만 가슴이 꺼지는 듯한 답답함이 남았다.
“생전에 같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까 싶어요.” 무서운 시위에 한열이는 왜 앞장섰을까. 배씨는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흔적을 되짚었고, 후회했다. “우리 한열이가 중2때 5.18 광주사태가 터졌어요.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밖에 못나가게 하고 무서울까봐 이불로 꼭 덮어줬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 한열이는 그게 부끄러웠던 거에요. 시내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숨고만 있었던 게 미안했던 거지. 대학 입학해서 진실을 알아버리고는 부끄럽다고 글을 써 놨더라고.”
배씨는 대학생인 아들과 생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어도 민주화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말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래도 ‘혹여 빨리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미련이 남는다. “유가협의 다른 어머니들이 교도소에 자식 면회 가는 것을 보면 많이 부러웠어요. 그런 거라도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나한테는 그것도 없었단 말이에요.”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무서울 게 없잖아요”
배씨는 아들을 보내고 두 달 뒤 유가협을 만났다. 유가협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몸을 바쳤거나 독재정권에 희생당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을 받고 사망한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1970년대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 유가족 등이 회원이다.
배씨는 이후 유가협과 함께 전국의 집회ㆍ시위를 찾아 다니며 정권의 사과 및 인권보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아들의 뜻을 대신 이루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배아파서 죽은 것도 아니고 머리 아파서 죽은 것도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잖아요. 아무 탈 없이 잘 키워놓은 아들이 죽었는데 분해서 집에서 가만히 살림만 할 수 없더라고요.”
배씨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부모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는 것이 가장 편했다. 처음 겪는 시위현장이 두려울 법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죄 없는 아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으랴. 매캐한 최루탄이 터지면 눈물 콧물은 물론 곡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들은 이것 때문에 죽기도 했는데 저 냄새 좀 맡는다고 엄마가 ‘죽겠다’ 소리 하면 되겠는가.”
그렇게 시작한 활동이 어느새 수 많은 사람들과 연대로 이어졌다. 유가협 회원들은 1991년 4월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소위 ‘백골단’으로 불리던 헬멧을 쓴 경찰 체포조에게 맞아 숨졌을 때 빈소로 달려가 부모를 위로했다. 그 해 학생 시위가 격렬해지자 유가협은 학생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여러분을 잃어 가슴이 찢어질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살아서 민주화를 이루자”며 전면에 나섰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나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가족이 슬퍼할 때도 그들은 사안의 경중에 상관없이 찾아가 힘을 보탰다.
30년간 겪었던 수 많은 사건 중 가장 배씨의 기억에 남는 것은 1999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한 일이다. 당시 60, 70대 고령이던 유가협 회원 20여명은 두 가지 법의 통과를 위해 422일간 망부석처럼 버텼다. 10년 넘게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부모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자 그제야 국회가 움직였다.
덕분에 이한열 열사는 2001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평생 바라던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하지만 배씨는 기쁘고도 씁쓸했다. “울어야 젖을 준다는 옛 말이 있죠. 이게 딱 그거더라고요. 누가 울지 않고도 인권문제가 해결되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한열이가 외쳤던 민주주의 잊지 않기를
여든이 다된 배씨는 여전히 바쁘다. 그가 겪은 아픔을 똑같이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지난해 10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사망한 고 백남기씨의 큰딸 백도라지씨를 끌어안았다. 지난달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 전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 위로의 말을 건넸다. “참고 견디고 힘내서 잘 살라고 했어요. 엄마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식의 이름 짊어지고 다니며 같이 살아야 세상이 잊지 않거든요.”
최근 배씨는 희망을 봤다. 지난해 겨울 서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을 보며 그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민주주의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걱정했어요. 옛날 같으면 거기다 최루탄 하나 쏴 버리면 사람들이 현장에 있을 수 없을 거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평화로운 집회가 이어졌어요.”
배씨는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내심 부러웠다. “1987년 당시에도 최루탄이 없었다면 우리 한열이 같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국민들이 하고 싶은 말도 다 했겠지요.”
30년간 민주주의를 외쳐온 배씨도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전히 답을 하기 어렵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 민주주의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는 아들이 꿈꾸던 세상으로 답을 대신했다. “평등을 외치다 죽었어요, 우리 한열이가. 평등이라는 것은 모두 같이 어울려 사는 거 아닙니까. 그런 세상이 민주주의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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