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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만 몰라요, 그네 시소 미끄럼틀 모래밭 없어도 신나는데

입력
2017.06.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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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놀이터는 어리석음 그 자체다. 왜 어디를 가나 똑같은가. 여름 날씨는 더운데 놀이기구는 왜 다 플라스틱이고 그늘은 왜 없나. 중앙에 비슷비슷한 놀이기구 하나가 떡하니 들어서 있던데, 이런 놀이터는 아이들보다 엄마들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일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는 2014년 한국에 처음 와서 놀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다’, 심지어 ‘감옥 같다’고 했다. 획일적인 놀이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나왔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 사옥 앞에 생긴 밧줄과 그물 놀이터. 어른들이 이틀간 워크숍을 하면서 직접 만들어 설치했다.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 사옥 앞에 생긴 밧줄과 그물 놀이터. 어른들이 이틀간 워크숍을 하면서 직접 만들어 설치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195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산업화ㆍ규격화한 놀이터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베낀 결과라고 지적한다. 놀이터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 온 적정기술과 기술놀이 교육연구가 김성원씨는 “한국의 놀이터는 미국어린이놀이터협회의 로비로 전후 일본 놀이터에 적용되기 시작한 ‘4S’를 그대로 모방했다”고 설명한다. 4S는 그네(Swing), 시소(Seesaw), 미끄럼틀(Slide), 모래밭(Sandbox)을 가리킨다. 한국의 4S놀이터는 1960년대 처음 등장해 지금까지 놀이터의 표준처럼 통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좀 더 창조적이고 개성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있다.

美 놀이터를 日거쳐 그대로 베껴

60년대부터 획일적 놀이터 고착

서구선 사회운동과 맞물려 변화

자연주의 모험놀이터 등 활발

어린이들이 설계 감리 참여한

순천 ‘기적의 놀이터’ 등

최근 우리도 “바꿔보자” 움직임

5월 27, 28일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에서 열린 놀이터 제작 워크숍은 어른 20여명이 참여해 밧줄과 그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야외 데크에 설치한 기둥 구조물에 밧줄을 걸고 그물을 엮어 만든 그네와 정글짐, 나무에 매단 외줄 원반 그네는 놀러 온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김성원씨와 숲밧줄놀이 강사 김창호씨가 이끈 이 워크숍은 숲이 없는 도시 놀이터에 밧줄과 그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를 제안하고 매듭법 등 필요한 기술과 관련 규정, 놀이기구를 소개했다. 추상적으로 놀이터의 중요성이나 원칙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과 기술을 다룬 것이 이번 워크숍의 특징이다.

김성원씨는 “지금 한국에는 놀이 담론만 있고 놀이터와 놀이기구에 대한 담론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놀이와 놀이터, 놀이기구를 충분히 이해하는 전문가나 놀이터 디자이너가 별로 없는 것도 아쉽다”고 덧붙였다. 요즘 국내에서 유행하는 모험놀이터만 해도 ‘위험하지만 안전하게’라는 막연한 원칙만 있고 구체적 실현 기술과 구성 방법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업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획일적 놀이터는 사회 인프라 분야의 적폐”라고 비판하면서 “시민사회와 예술가들이 참여해 창조적인 놀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안전을 이유로 창의를 막는 행정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놀이터, 한뼘 놀이터, 게릴라 놀이터 만들기를 사회적 일자리로 만들자”는 제안도 내놨다.

덴마크 아르후스 도서관ㆍ시민센터의 놀이터 중 일부. 이 놀이터를 만든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로 이뤄져 있다. www.monstrum.dk
덴마크 아르후스 도서관ㆍ시민센터의 놀이터 중 일부. 이 놀이터를 만든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로 이뤄져 있다. www.monstrum.dk

좋은 놀이터를 만들려면 조경 전문가, 건축가, 디자이너, 어린이, 어린이 전문가, 놀이터 전문가 등 여러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 덴마크의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들이 함께한다. 몬스트룸이 만드는 놀이터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고, 아이들에게 상상과 도전을 통해 영감을 불어넣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60년 전 4S시대에 멈춘 놀이터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서울문화재단이 시작한 ‘문화가 있는 놀이터’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놀이터를 아이와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놀이터 디자인을 공모해 놀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놀이기구를 비롯한 놀이터 외형을 바꾸고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기업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협력한 이 실험은 놀이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씨앗이 됐다. 낡고 오래된 놀이터 300개를 리모델링한 서울시의 ‘상상어린이공원’ 프로젝트, LH공사의 친환경 놀이터 리모델링, 환경부 사업인 생태놀이터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이런 시도는 놀이터 디자인이 어린이의 정서를 고려해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주로 형태에 치중하는 한계도 있다. 최근에는 생태, 친환경, 공동체, 주민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지자체의 놀이터 사업 중 요즘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순천의 기적의 놀이터다. 어린이들이 설계와 감리에 참여하고 전문가와 행정이 협력해 만드는 기적의 놀이터는 지난해 처음 선보였고 올해 5월 두 번째가 개장했다. 2020년까지 10개로 늘릴 계획이다. 틀에 박힌 붕어빵 놀이기구가 없고, 언덕과 비탈 같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스스로 몸을 돌보며 ‘건강한 위험’을 마주치는 놀이터를 지향하고 있다. 수원시도 올해부터 어린이가 직접 만드는 놀이터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디자인하는 이런 놀이터를 올해 5개 만들 계획이다.

6월 3일 서울 하자센터에 놀러온 아이들이 종이 상자로 만든 터널. 놀이기구가 있어야만 놀이터는 아니다.
6월 3일 서울 하자센터에 놀러온 아이들이 종이 상자로 만든 터널. 놀이기구가 있어야만 놀이터는 아니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가 2015년 시작한 ‘움직이는 창의놀이터’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을 하다가 놀이의 중요성을 절감한 작가들의 놀이터와 놀이 제안 활동이다. 하루 동안 생겼다 사라지는 이 반짝놀이터는 그동안 시민청, 서울광장, 서울혁신파크에서 선보였고, 올해는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에서 ‘놀이터가 미끄덩’이라는 이름으로 판을 벌였다. 잔디밭 비탈에서 물에 젖은 비닐 미끄럼 타기, 깡통 신발 신고 걷기, 커다란 고무통에 쑥 들어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등 여느 놀이터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미끄덩 놀이터에서 펼쳐졌다.

놀이터는 자연이 사라진 산업도시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놀았고 자연은 가장 훌륭한 놀이터였다. 산업화로 집과 일터가 분리되면서 어른들이 일하러 간 사이 방치된 채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치는 사고가 많아지자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게 놀이터다.

올해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 팝업놀이터에 등장한 고무통 놀이. 데굴데굴 굴리면 빙글빙글 돈다.
올해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 팝업놀이터에 등장한 고무통 놀이. 데굴데굴 굴리면 빙글빙글 돈다.

서구에서 놀이터의 역사는 160년쯤 됐다. 놀이터의 변화는 사회운동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전후 등장한 숲놀이터의 뿌리는1930년대 자연주의 놀이 운동이다. 1943년 나치 치하 덴마크 코펜하겐에 처음 나타난 모험놀이터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68혁명의 열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졌다. 놀이터 구성, 놀이기구 제작과 설치, 놀이 선택권까지 전부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모험놀이터의 본래 모습이다. 이런 맥락과 정신은 빠진 채 어른들이 만들어서 제공하는 체험 공간을 과연 모험놀이터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네덜란드 흐로닝엔의 목수 축제에서는 250명의 10~15세 아이들이 톱과 망치, 목재 팔레트로 나흘 만에 모험 공원과 아지트를 만들었다. ‘플레이파크’로 불리는 일본의 모험놀이터가 무허가촌이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것도 완전한 자유의 결과다. 거기서 아이들은 불 피우고 구덩이 파고 나무에 오르고 기지를 만들고 댐을 짓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논다. 플레이파크는 1979년 도쿄 하네기공원에 처음 생긴 이래 일본 전역에 모험놀이터 만들기 시민단체가 400개를 헤아릴 만큼 널리 퍼졌다.

건축가, 예술가, 교육자 등이 참여해 전후 다양한 발상과 시도가 넘치던 세계의 놀이터 디자인은 1980년대 들어 위기를 맞는다. 안전 관련 법과 규제는 놀이터 시공업자와 놀이기구 업자들을 위한 표준이 되어 놀이기구의 획일화로 나타났다. 2000년대 들어 상업화한 놀이터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과 예술가들이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다. 잘 놀아야 잘 자란다. 아이들은 놀면서 공간을 탐색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른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요즘 한국 아이들은 놀 시간도 장소도 함께 놀 친구도 없다. 아무 목적 없는 즐거움 자체여야 할 놀이를 창의력 발달에 중요하다며 생산성을 따지고, 놀이 체험 프로그램에 보내고, 키즈카페 같은 상업 공간에서 돈 내고 소비하게 하는 어른들의 강박은 놀이라는 ‘알리바이’를 구성할 뿐이다.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어른들 생각대로 만든 ‘알리바이 놀이터’가 많다. 이제는 놀이터다운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줄 때다.

글ㆍ사진=오미환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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