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잠복근무 때 동전 소리 날까 봐
출동 전 모으던 동전으로
생계 어려운 ‘장발장’에 온정
“돼지저금통 동전으로 사정이 딱한 ‘장발장’을 돕고 있습니다.”
대구 성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류동은(52ㆍ경감) 팀장의 책상 위에는 축구공만한 돼지저금통이 놓여 있다. 류 팀장과 황욱섭 경위, 한창현 경사, 오승진ㆍ이동규 경장 등 수사팀 형사 5명이 동전을 모으고 있는 비자금 금고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제법 살이 통통했는데 지금은 생계형 범죄자를 돕느라 홀쭉하다.
“2년 전 돼지저금통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형사들이 알아서 동전을 넣으면서 수사팀의 비자금 금고가 됐다”는 류 팀장은 “동전이 차면 항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생겨 돼지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이달 초에도 저금통 배를 갈랐다. 대구 달서구의 한 재래시장에서 어묵 두 봉지가 없어졌다는 신고를 받았다. 범인을 추적해 도착한 곳은 허름한 한 아파트였고, 체납고지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범인(54)은 고개를 떨구며 눈물부터 흘렸다. “죄송합니다. 딸이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 잘못인 줄 알면서 훔쳤습니다.”
돌처럼 굳은 밥알이 담긴 밥솥 위에는 A4용지에 ‘시장에서 어묵을 두 번 훔쳤다. 혹시 죽게 되면 자식들을 잘 돌봐달라’는 유서가 놓여있었다.
10여 년전 이혼한 후 아들, 딸을 혼자 키우고 있는 범인은 지난해 여름 당뇨병이 심해지면서 막노동도 그만뒀다. 수입이 끊긴 지 석 달이 지나자 쌀독과 냉장고가 텅 비었다. 중학생 딸의 유일한 끼니는 학교급식이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입대한 아들은 사병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집에 부치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범죄자들에게 저승사자로 소문난 황욱섭(51) 경위는 그날 즉시 팀장에게 수사 내용을 보고했고, 심야에 수사팀 긴급회의가 열렸다. 만장일치로 돼지저금통 배를 갈라보니 25만원 가량 나왔다. 형사들은 다음날 범인 집을 찾아 편도 4㎞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딸의 버스카드에 15만원을 충전해주고 학용품을 사줬다. 또 자신들의 집에서 가져온 쌀과 김치, 고기로 범인의 냉장고도 채웠다.
관할 구청과 동사무소도 나섰다. 긴급생계지원비 명목으로 월세와 생활비 90만원을 건넸다. 수사팀은 고용지원센터에도 협조를 당부해 체납액을 나눠 낼 수 있도록 했고, 딱한 사정을 들은 어묵집 사장도 ‘선처’를 호소했다.
2월에는 청각장애가 있는 80대 독거노인이 돼지저금통 덕을 봤다. 폐지를 들고 갔다 절도죄로 조사를 받던 깡마른 노인이 조사 후 국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먹고는 “차비가 없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돼지저금통 2만원 가량의 동전이 노인 주머니로 들어갔다. “국밥 사드세요”라는 형사의 말에 노인은 “다시는 길거리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최근 돼지저금통이 자주 홀쭉해질 정도로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사팀의 마음도 무겁지만 사회가 점점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류동은 팀장은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하거나 범인을 추적할 때 동전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어 출동 전 동전을 보관하기 위해 돼지저금이 등장했다”며 “얼마 되지 않지만 생계형 범죄자를 돕자는 형사들의 마음이 돼지저금통에 담겨있다”고 말했다.
대구=글ㆍ사진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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