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직조를 한 지 3년 된 조회은(39)씨는 시골 집에서 직조하면서 사는 ‘귀요미’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다. 작은 공방을 차려 직조 수공예품과 직조 관련 그림책도 팔면서, 씨실과 날실을 교차해 직물을 짜듯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삶을 엮고 싶어한다. 그의 작업실은 서울 약수역 근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어쩌면사무소’다. “뭐가 될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서 어쩌면사무소, 만들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작은 아지트인 이 곳은 주중에는 이것저것 만들기를 하고 주말에는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소품과 읽은 책, 권하고 싶은 책을 판다. 베틀로 컵받침,깔개 등 생활소품을 짜는 ‘직녀’ 조씨 와 바느질하고 뜨개질하면서 번역도 하는 이, 글 쓰고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이, 셋이 함께쓰는 공간이면서 개인 작업 틈틈이 워크숍도 한다. 속도에 쫓기며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을 향해 이 곳의 시간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흘러간다.
베틀과 길쌈이 여성의 일상이던 전통시대를 벗어난 지 오래, 기계화에 밀려 사라졌던 손 직조가 돌아오고 있다. 아직 소수의 취미 생활에 머무는 편이지만, 자급자족과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지고 있다. 인터넷을 뒤지면 직조 공방과 모임, 직조 방법과 작품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대안학교와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예술과 감성교육의 하나로 직조를 하는 곳도 늘고 있다. 베틀이 있어야만 직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을 짜려면 큰 베틀이 필요하지만, 간단한 소품은 버려진 액자틀에 촘촘히 못을 박거나 종이상자에 홈을 파서 실을 걸어도 만들 수 있다. 도구가 전혀 없이 허리에 실을 감고 기둥에 걸어 끈을 짤 수도 있다.
수공예 직조는 느린 반복 작업이다. 길이 2m 좁은 허리띠를 무늬 없이 짜려면 두세 시간, 무늬를 넣으면 그 두 배가 걸린다. 시간과 노력 대비 결과만 따진다면 비효율적인 작업이지만, 서툰 솜씨라도 손으로 만든 것은 공장제 물건에는 없는 온기가 있다. 사서 쓰면 더 싸고 편할 텐데 왜 굳이 수고롭게 직조를 하느냐는 질문에 조씨는 이렇게 답한다.
“직조는 꼭 명상 같아요. 씨실과 날실을 반복해서 엮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죠.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쁜데 멈추고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직조는 시간을 짜고, 삶을 짜고, 관계를 엮는 거에요. 잘하지 못해도 스스로 만드는 충족감이 있죠. 창조성이 높아지는 느낌이랄까, 일상에서 예술을 하는 느낌이 들어요. 직조를 하고부터는 뭐든 그냥 넘기지 않게 됐어요. 네팔에서 만든 직조 가방을 산 적이 있는데, 날실 한 올이 삐져 나온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이걸 짰을까. 손이 많이 갔겠구나. 무슨 생각을 하며 짰을까. 예전에는 ‘불량이네’ 하고 말았을 텐데, 모르는 사람과 어떤 ‘관계’가 생기는 거죠.”
그는 전남 장흥의 마실장에서 직조를 처음 접했다. 마실장은 장흥 지역의 귀농귀촌인들이 장날과 겹치는 주말에 여는 장터다. 거기서 베틀 만드는 목수와 직조 기술자의 직조 시연을 보고 반해 바로 베틀을 사서 시작했다. 아직 배울 게 많아 ‘혼자 노는’ 단계라는데 가끔 만든 것을 팔거나 요청이 있으면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직조 수공예 생활자로 살고 있다.
그때 시연을 했던 적정기술 연구자 김성원씨가 2014년 시작한 ‘베틀베틀’ 워크숍은 생활기술로서 직조를 알리고 확산하는 중심이 되고 있다. 직조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던 때라 관심 있는 이들이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모임을 해보자고 마련한 직조 ‘부흥회’다. 올해 1월 평택 워크숍까지 매년 2~3차례 열리는데, 많게는 40명이 모인 적도 있다. 장흥, 강진, 하동, 제주 등 여러 곳에서 했고 올해도 여름에 있을 예정이다.
‘직조하는 남자’ 김성원씨는 10년 전 장흥으로 귀촌해 흙부대집을 손수 지은 것을 계기로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는 데 필요한 생활기술을 하나하나 익히고 알려 왔다. 대장간의 철 다루는 기술, 화덕과 난로 만들기, 수공예 등 여러 가지를 하다가 3~4년 전부터 직조에 빠져 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서 시골로 내려온 그에게 직조는 위로와 치유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 북미, 유럽, 일본 등에서 직조는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치유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직조는 장애인과 노인,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로도 부활하고 있다. 노숙자와 빈곤층이 만든 래그러그(헌옷이나 천으로 실을 만들어 짠 깔개)를 파는 미국의 리룸, 나이든 여성에게 새로운 일자리와 기술을 제공하는 라트비아의 루드러그, 가난한 여성들이 헌옷을 재활용한 실로 직조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필리핀의 R2R 등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이 활동 중이다.
조금씩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한국에서 직조는 개인의 취미 또는 체험에 그치는 편이다. 직조를 알리는 데 앞장서 온 김성원씨는 직조 수공예가 살아 남고 확산되려면 일상 생활기술로 정착하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업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상기술이 되려면 우선 보급형 직기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지금은 베틀 등 직조 도구와 실값이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워요. 현대 산업사회에서 수공예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제품 판매만으로는 안 돼요. 서양에서는 대장간도 워크숍을 하는 등 종합적 문화산업 차원에서 접근하더군요. 직조도 교육, 체험, 재료와 도구의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입체적 플랫폼이 있어야 경쟁력 있는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럽 섬유산업의 경쟁력은 뛰어난 디자인에 있는데 그 바탕은 수공예 직조에요. 디자인한 섬유를 손베틀로 먼저 짜고 그 결과를 직조 소프트웨어에 입력해 자동화 기계로 양산하죠. 창의성은 사람 손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올해 서울혁신파크의 리빙랩 공모사업에 당선된 청년 회사 ‘123컬렉터’의 재활용 직조 프로젝트는 수공예 직조의 비즈니스 모델과 지속 가능한 기술 생태계를 만들려는 첫 시도다. 123컬렉터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출신 청년들이 올해 초 창업했다. 이들은 헌옷으로 실을 만들고 옷을 짜서 파는 것 외에 직조기 개발과 제작, 의류 디자인 개선 작업, 헌옷 수집을 위한 협력 체계 구축 등을 통해 직조가 사업으로 선순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보려 한다.
국내에서 생활기술로서 직조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대안학교다. 과천 맑은샘학교, 강화 산마을고등학교, 서울 마포의 성미산학교, 영등포의 하자센터 목화학교 등이 직조 수업을 하고 있다. 대학과 대학원 과정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도 김성원씨의 지도로 올해 직조 수업을 시작했다.
하자센터 목화학교는 15~17세 청소년을 위한 1년 과정으로, 목화의 한해살이에 맞춰 움직인다. 봄에 목화를 심는 것으로 시작해 베틀과 물레를 비롯한 직조도구를 직접 깎아 만들고, 목화가 쑥쑥 자라는 여름에는 물레와 베틀을 손에 익히고, 가을이 되어 목화솜이 몽글몽글 터지면 수확해서 말리고 실을 자아 직조를 시작한다. 실과 천을 만드는 직조를 중심으로 도시농업, 목공, 자전거 기술 등을 배우며 학생들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체력을 키운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픈 워크숍 ‘시와 물레’를 열어 관심 있는 이웃들을 만난다.
목화학교에서 보듯 직조는 지속 가능한 삶과 자급자족의 생활기술로 우리 곁에 돌아오고 있다.물건을 사기만 하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손수 만들면서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이들이 직조에 발을 내딛고 있다. 최근 직조를 비롯한 수공예와 손노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배경에는 고용 없는 경제, 청년 실업 등 경제적 어려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먹고 살기 힘들수록 소비보다는 직접 만들고 고치며 일상을 꾸려 보려는 사람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직조라는 손노동은 시간이 남아서 하는 취미 활동이 아니라 자유와 자존을 지키기 위한 몸짓인 셈이다. 오미환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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