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출간 현응 스님 철학서
정밀한 논리에 감탄해 번역
“미국선 불교 좀 알아야 교양인”
“자아나 영혼 같은 게 없다고 보는 불교는, 말하자면 굉장히 ‘쿨’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뭔가 좀 허전하니까 우리는 자꾸 영혼, 사랑 같은 ‘핫’한 것들을 집어넣지요. 그 지점에서 서구인들은 우리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같은 말들은 연기(緣起), 공(空)의 논리와 안 어울린다고 보는 거지요.”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라는, ‘방편’ 같은 표현도 이 간극을 메워 주지 못한다. “중생 계도를 위한 방편이라고 하면, 논리를 중요시하는 서구인들은 있는 그대로 설명해야지 왜 그걸 살짝 속여야 하느냐고 되물어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책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 영문번역 작업을 한 홍창성(53)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교수의 말이다. 홍 교수의 이런 말은 왜 그가 현응 스님의 책을 번역했는가와도 통한다.
‘깨달음과 역사’는 현응 스님이 1990년 내놓은 불교 철학서다. 사회적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 경지로 상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은은하게 화제가 되던 이 책은 2015년 책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면서 ‘깨달음 논쟁’으로 번졌고, 불교계는 이 주제를 두고 1년여 동안 치열하게 논쟁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삶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화’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은 참선(參禪)과 선정(禪定)을 강조하는 분들에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지요.” 깨달음이란, 화두 하나를 붙잡고 오래오래 고심하다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와 관계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지난해 깨달음 논쟁을 반영해 책이 새롭게 나왔고, 홍 교수는 이 책을 번역했다.
홍 교수는 원래 정밀한 논리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을 전공해 미국에 정착한 서양철학자다. 유학 시절 숭산 스님의 선원을 드나들다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분석철학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 꾸준히 공부했다. 미국철학회 아시아분과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세계적 불교 학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했다. 2010년 가을 우연히 현응 스님이 쓴 논문을 접하고서는 그의 논리에 반했고, 그의 책을 구해 읽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제 딴엔 열심히 공부한다 했지만 해외에서 독학하듯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제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건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제 궁금증이 당연한 것이었구나, 제 공부가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 기뻤고, 또 현응 스님이 그에 대한 대답을 다 해 놔서 기뻤습니다. 그것도 이미 1990년에 그렇게 해 놨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했지요.”
한 달 동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곱씹어 가며 책 전체를 꼼꼼히 다 읽었다. “속된 말로 칼 들어갈 곳도 없을 정도로 정밀한 논리가 놀라웠다”고도 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주변 미국인들에게도 몇 편 뽑아 소개했더니 열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독실한 기독교도, 독실한 유대교도들도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영역본이 언제 나오냐며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다 한다. 홍 교수는 “요즘 미국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좀 알아야 교양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만큼 일반인들 반응도 좋을 것이라 기대한다”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도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 불교계에 대한 아쉬움으로도 이어진다. 2012년 동국대 세미나에 참석한 경험을 들었다. 분석철학자이다 보니 성철스님과 비트겐슈타인을 비교한 주제발표를 맡았다. “성철 스님은 대단하신 분이지요. 하지만 학자로서 현대적 의미에서 보자면 몇 가지 부분이 아쉽다고 논평했습니다. 그게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라 생각했는데, 발표 뒤 1시간 반 동안 엄청나게 공격적인 질문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 논쟁에 대한 자리를 다시 한번 더 마련했다. 함께 책을 번역한 아내 유선경(52) 미네소타주립대 교수와 함께 강연ㆍ토론회를 연다. 21ㆍ22일, 28ㆍ29일 서울 자하문로 사찰음식전문점 마지에서다.
홍 교수는 불교적 깨달음을 누려 본 경험이 있었을까. “2004년 쌍둥이를 낳았어요.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던 아내가 저 때문에 철학으로 갈아타고 뒤늦게 한창 학위 공부를 할 때라 제가 2년 정도 휴직하고 육아를 했었죠. 기저귀를 7,500장쯤 갈았을 때 머릿속이 환해지는 경험을 했었지요.”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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