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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권태기에 빠진 남자, 앞집 남자의 치정 살인을 추리하다

입력
2017.06.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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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감독은 작품 속에서 아이러니를 잘 다룰 줄 안다. 앨프리드 히치콕이야말로 그렇다. 게다가 히치콕은 감독으로서의 이력 자체도 그랬다. 최대다수의 최다쾌락을 겨냥하면서도 가장 개인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냈고, 순수영화라는 절대적 가치를 바라보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영화제작 전반에 걸친 당대의 현실적 제약에 대해 능숙하게 타협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으니까.

'현기증'과 '이창'은 공통점이 많다. 그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나온 걸작이면서, 히치콕의 페르소나에 가장 가까운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히치콕이 일평생 선호해온) '차가운 금발 미녀' 배우가 출연했다. 두 편 모두에 관음증 모티브가 담겨 있으며, 영화 만들기에 대한 방법론을 이야기 속에 녹여 넣은 메타영화적 속성도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히치콕의 알레고리적 자서전으로 읽힐 만한 면모가 있다. 그의 영화들에는 역설적이고도 자기모순적인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이 두 편이 그렇다. '이창'과 '현기증'이야말로 히치콕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영화일 것이다.

●이창(1954)

망원경으로 앞집을 훔쳐보다

여자가 죽었다고 확신한 남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신의 상황과 기묘하게 닮아

●현기증(1958)

그녀와 닮은 여인을 만나

죽은 연인 되살려내려 안간힘

어쩌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이창'
영화 '이창'
영화 '이창'.
영화 '이창'.

‘이창’(1954)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진작가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는 무료함 때문에 망원경으로 맞은 편 건물 사람들을 훔쳐보다가 라스라는 남자가 아내를 살해했다고 믿게 된다. 제프는 확신을 얻기 위해 애인 리사(그레이스 켈리)를 건너편 건물로 보낸다.

'이창'은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 사람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밑바닥에는 제프와 리사의 미묘한 관계가 의미심장하게 깔려 있다. 리사는 제프의 집으로 처음 들어올 때 키스를 하는데, 이 장면은 제프의 얼굴을 뒤덮는 리사의 그림자로 불길하게 표현되고 있다. '현기증'과 '싸이코'를 포함한 적잖은 영화들에서 그렇듯, 상대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제프는 리사를 사랑하면서도 시종 그녀로부터 안전하게 심적 거리를 확보하려는 역설을 보인다.

'이창'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프와 리사의 관계가 라스 부부의 관계와 기묘하게 겹친다는 점일 것이다. 라스는 떠돌아 다니는 직업을 갖고 있고 아내(연인)에게 매어 있으며 본의 아니게 금욕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건 제프도 마찬가지다. 제프가 망원경으로 본 것이라고는 라스가 두어 차례 밖에 나갔다 돌아온 것과, 이전에 라스의 집에 있었던 라스의 아내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제프가 겨우 그 정도의 단서만으로 살인을 추론해냈다면, 그건 아내에 대한 라스의 권태나 환멸에 감정적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제프는 결혼하고 싶어하는 리사의 소망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비치는데, 이같은 그의 두려움은 세계를 누비면서 일하다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집에만 있게 되어 권태에 빠진 제프의 상황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말하자면 기이한 공범의식을 느끼고 있는 제프는 앞집 남자의 범행을 파헤치고 고발함으로써 자기 안의 라스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현기증'.
영화 '현기증'.
영화 '현기증'.
영화 '현기증'.

‘현기증’(1958)

현기증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는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는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이에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매들린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날 매들린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주디(킴 노박)를 우연히 만나게 되자 스카티는 그녀를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려 한다.

현기증이라는 증상에는 두려움과 쾌감이 아이러니하게 공존하고 있다(몸을 구부린 채 코끼리처럼 코를 쥐고서 빠르게 맴을 돈 후 찾아오는 어지럼증을 일부러 즐기던 어릴 적 놀이를 떠올려보라.) 현기증은 대지에 늘 버티고 서야 하는 고단한 책무를 돌연 포기해버렸을 때 생겨나는 쾌감과, 그와 정반대로 끝내 쓰러져 땅과 하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 어딘가에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곧 삶과 죽음의 마찰에서 생겨나는 역설적 희열이기도 하다.

주디는 곧 스카티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스카티는 주디를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결코 그녀를 취하지 않는다. 스카티는 주디를 통해 이미 죽어버린 매들린을 되살려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마침내 주디가 매들린과 똑같이 옷 입고 매들린과 똑같은 헤어 스타일을 한 채 욕실 문을 나오자 스카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탄성을 지른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무망하다. 사실 스카티는 죽은 여인을 되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정말 그녀가 되살아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티는 매들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매들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그의 욕망은 솟구치는 순간 곧바로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그 사랑은 곧 죽음에 대한 사랑이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해피엔드일 수 없다. 아마도 스카티는 히치콕의 모든 주인공들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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