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이 맘 때쯤 인생관이 살짝 바뀌는 경험을 하고 이후로 삶의 질도 조금 높아졌는데,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화이고, 아침에 읽기엔 약간 지저분한 구석도 있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 ‘예민하다, 유난 떤다’는 비난을 삼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전북 부안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했더랬다. 서해를 내려다보는 아름답고 조용한 펜션이었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굉장히 저렴한 요금으로 한 달에서 두 달까지 그곳에 머물며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는 집에서도 잘 쓰는 편이긴 한데, 선배 작가의 소개를 받고 흥미가 생겨 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응모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면서 노트북과 옷 몇 벌을 챙겨 부안으로 내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만족이었다. 갯벌 위로 바닷물이 빠지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외딴 장소에서 머무는 몇 주 동안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이런저런 작품 구상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적으려는 건 글이나 마음이 아니라 몸에 대해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거 정말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황폐하게 만드는 끔찍한 질병이다. 외출할 때 늘 휴지를 챙기고, 주변에 깨끗한 화장실이 어디인지 늘 파악하고, 어지간하면 고속버스보다는 기차를 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두 번은 울상이 되어 공중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고비에 빠진다. 집에서 안전하게 용무를 해결할 때도 전반적인 프로세스가 시원하고 상쾌하다기보다는 우중충하고 찜찜한 분위기다.
그런데 변산반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체질이 싹 바뀐 것처럼 그런 고초를 전혀 겪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스턴트 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랬다가 볼 일을 보러 하루 서울에 왔던 날 크림소스 파스타를 먹은 뒤 곤경에 빠지고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우유가 문제였구나! 나는 유당불내증 환자였던 것이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내 몸을 소재로 생체실험을 벌여봤는데, 틀림없었다. 라면이나 햄버거, 분식은 아무리 먹어도 괜찮았다. 유제품만 멀리하면 됐다. 지긋지긋한 고질병에서 완쾌된 기쁨과 ‘40년 넘게 이걸 몰라서 그 사달을 겪었다니’ 하는 허탈함이 교차했다.
이후로는 먹을 것에 대해 까탈을 부리는 사람이 됐다. 공중화장실 앞에서 하늘이 노래지는 상황에 다시는 처하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이전까지는 “식당을 어디로 잡을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못 먹는 음식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늘 내가 무던하고 호방한 성격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답했었다. “아무 거나 괜찮습니다, 저는 다 잘 먹습니다, 선생님이 드시고 싶은 걸로 하세요”라고.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피자 한 판 시켜 먹을까”라고 누군가 제창하고 다들 “오우, 굿 아이디어!”라고 박수를 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전 피자 못 먹는데요”라고 대꾸해서 처음부터 산통 깨기. 또는 남들이 피자 먹을 때 말없이 자리에서 떨어져 있다가 “왜 안 드세요”라는 질문에 “저는 피자 못 먹어서요”라고 말해서 뒤늦게 분위기 가라앉히기. ‘예민하다,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수군댐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대장이 예민해져서 유난 떠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그러면서 때로는 ‘메뉴 통일’이라는 간단한 행위조차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압박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여기 치킨은 치즈가루 살짝 뿌린 거라는데 살살 털어서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생크림케이크는? 한 입도 안 돼? 카페라테도 안 마셔요?”라는 질문 근처에 아슬아슬한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으면 질문이 더 이상 질문이 아님을 납득하게 됐다.
얼마 전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돼 수만 명이 가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밥집에서 눈총을 무릅쓰고 오이를 빼달라고 요구한다거나, 편식하지 말라는 학교 선생님 때문에 울면서 오이를 먹었다는 회원들의 에피소드가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특정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오이 맛을 다른 사람보다 1000배 더 쓰게 느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어떤 메뉴는 나와 맞지 않음을 파악하게 되면서, ‘메뉴선택권’이라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권리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어떤 이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취향이나 고집의 차원이 아니라…
이 깨달음을 조금 더 밀어붙여도 될까. 행복도 음식과 같아서, 사람마다 좋아하는 맛이나 향이나 모양이나 색이 다르다고. 동시에 누군가에는 더 없는 풍미인 요소가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모두에게 자신의 행복을 각각 정확하게 추구할 권리가 있고, 거기에 대해 예민하다거나 유난 떤다고 핀잔을 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우리가 서로 다른 메뉴를 먹으면서도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 웃으며 함께 식사할 수 있다고.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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