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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테이에서 온 편지] 인도 여행에서 떠올렸다, 위대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입력
2017.06.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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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첸나이 인코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배요섭 예술텃밭 대표.
인도 첸나이 인코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배요섭 예술텃밭 대표.

연극은 노마드다. 배우들의 뛰는 발로 천천히 유랑하는 연극을 꿈꾸던 퍼포먼스 그룹 뛰다가 지금 머무는 곳은 이상하게도 예술텃밭이다. 단순한 자연 순환의 원리가 당연하게 지켜지는 곳이 텃밭인 것처럼, 연극도 삶의 고리 안에서 당연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뛰다는 2010년 화천의 시골마을에 터를 잡았다. 그 후 7년 동안 뛰다와 동지화 마을 사람들의 정성과 땀들이 모여 문화공간 예술텃밭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그림책방이 이제 막 일어서려고 한다. 연극과 책이라는, 그럴듯하지만 조금은 어색한 조합으로 예술텃밭이 부끄럽게도 북스테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연극이 살아 움직이는 책이라고 한다면 예술텃밭은 꿈틀대는 도서관이고 텃밭극장은 책들의 무대인 셈이다.

잠시 2017년 안식년을 맞아 가족과 인도를 유랑하는 와중에 이런 글을 부탁받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지만 이걸 핑계로 먼저 인도의 신화와 관련된 그림책 ‘오냐나무’를 소개할까 한다.

인도 신화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이야기가 있다. 이 나무의 이름은 ‘칼파타루’. 이 나무 아래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생각은 모두 현실로 이루어진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심지어 자신이 두려워하는 마음 속 악귀가 현실로 나타나 그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냐나무’는 이 인도의 신화를 모티브로 만든 그림책이다. 아냐벌레를 불러 무서운 생각을 먹어버리게 한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마지막엔 “생각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니까”라고 말하는 늙은 개의 대사가 울림으로 남는다. 단순하면서도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그림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과 마음에서 피어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 가족은 인도 남부 오로빌이란 마을 근처에 머물고 있다. 50년째 인류의 선한 의지를 증명하려고 노력 중인 이 공동체마을 한 가운데에는 명상홀인 마뜨리만디르가 있다. 처음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둥근 구로 된 하얀 방 안에서 절대의 침묵을 경험했다.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의 명상. 내 안의 생각이 얼마나 격렬하게 요동치는지를 곧 깨닫게 되는 우주의 미아 같은 침묵. 오냐나무 아래에 사는 동물들의 하소연대로 생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늙은 개가 불러낸 아냐벌레들은 바로 생각을 가만히 ‘바라봄’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보면 사라진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아디샥티라는 레지던스 공간은 인도의 한 극단이 운영하고 있다. 여러 개의 게스트하우스와 식당, 극장, 수영장 등이 있고, 수시로 여러 예술가들이 워크숍과 창작 레지던스를 위해 방문한다. 이 공간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꾼들이 20명 정도 있는데 그 근처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다. 일하는 여자들을 ‘암마’라고 부르는데, 피부가 유난히 더 까맣고 몸집도 작다.

오냐나무

이효담 지음ㆍ강혜숙 그림

웜홀 발행ㆍ48쪽ㆍ1만1,000원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지음ㆍ박찬원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488쪽ㆍ1만5,500원

카스트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는 않지만 그들의 관계들 속에서 무언가 불편한 흔적들을 느끼게 된 건 인도에서 생활한 지 5개월 정도가 지나면서이다. 짧은 인도 생활이었지만 덕분에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 더 선명하게 읽혀졌다. 20년 전에 쓰여진, 그보다 더 2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마치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꾸 숨이 막혀오고,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하는 시간도 많아야 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처럼 숨을 고르고, 눈물을 닦아내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카타깔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의 비밀이란 거기에 아무런 비밀이 없다는 것임을 이미 오래 전에 알아냈다. ‘위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들은 것이고, 다시 듣고 싶은 것이다. 스릴과 교묘한 결말로 현혹하지 않는다. 여인의 살 냄새처럼, 결말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귀 기울인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대한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사랑을 찾고, 누가 사랑을 얻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위대한 이야기들’의 신비이자 마법이다.“

로이는 카타깔리 배우가 한 말을 빌어 그 위대한 이야기에 도전하려는 듯 보인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문제를 놓고 섬뜩하게, 세밀하게 그려가는 그 필력을 보면 왜 20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20년째 환경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글을 발표해오고 있다. 하지만 논픽션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위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은 그 독특한 문체였는데, 그 이유를 오늘 조금 알게 되었다. 첸나이주의 인코 센터(인도 한국 문화원)의 센터장 라띠자퍼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로이 얘기가 나왔다. 라띠는 로이와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케랄라 출신이었다. 그는 로이의 문체에서 케랄라의 말인 말라얄람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로이는 영어를 케랄라 방식대로 쓰고 있다고, 그래서 로이의 영어문체가 특이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 말에 어렴풋이 수긍하듯 로이의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 소설로 단번에 부커상을 받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과정에 책은 이렇듯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제시한다. 인도에서 우리의 삶 역시 책과 더불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배요섭 화천 문화공간 예술텃밭 대표ㆍ북스테이네트워크(bookstay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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