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자체가 차별적… 그리스 희곡부터 남성 중심
스태프들과 토론하며 수정해 보지만 한계 커
“엄마, 젊은여자, 창녀 역할뿐” 여배우들도 한탄
활동하는 여성 연출가 숫자 늘었지만
여자라 작품이 섬세” 구별짓기 여전해
여성 창작자들 자기검열 하지 않았으면
지난달 29일 열린 서울연극제 폐막식에서 최용훈 예술감독은 "연극제 사상 여성 연출가 비중이 이번이 처음으로 50%였다. 연극계도 여성 파워가 점점 올라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산예술센터는 공공극장 최초로 3월부터 시즌 프로그램을 함께하는 협력극단 및 극장의 모든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성 연출가의 숫자가 이전보다 늘었고, 성희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연극계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다. 연극계가 변화하고 있다고 하나 여성 연출가로서 삶도 크게 바뀌고 있는 것일까. 여성 연출가 부새롬(41), 서지혜(38), 이기쁨(33)이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를 찾아 여성의 시선으로 본 연극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여성 연출가 비율 50%, 실제로 그런 변화를 체감하나.
부새롬(부)=“연출가 데뷔 전에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2000년대 초반 작업했던 연출가는 다 남자였다. 여성 숫자가 늘어난 건 체감한다. 최근 늘어난 여성 연출가 연령대는 30~40대인데 흔히 말하는 경력단절을 아직 겪기 전인 나이다.”
서지혜(서)=“남자 선배들이 농담으로 ‘시집 가면 그만이지, 10년 뒤까지 있겠냐’는 취지의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30대 후반이 되고 보니까 예전에 같이 하던 또래 친구들이 없더라. 요즘 들어 5,6년 차이 나는 후배 여성 연출가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느낀다.”
-경력단절 후 다시 돌아온 여성 연출가는 없나.
부=“여자 선배들 자체가 별로 없어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서=“연출가끼리 부부인 경우에도 남자들은 작품 활동을 계속해도 여자들은 전업주부가 되더라. 배우 부부일 때도 남자는 무대에 서는 반면, 생활비 문제로 여자는 마트에서 일하는 경우도 봤다.”
-왜 그럴까.
부=“여자 배우가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 없는 문제랑 맞물린다. 희곡 자체가 그렇다. 그리스 시대부터 남자만 글을 썼다. 셰익스피어도 그렇고 2000년 동안 쌓여 온 작품들이 남성중심이고, 최근에 나온 작품들은 극히 적다. 작품의 특정 장면이 성차별적인 것보다도 작품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 여배우들 역할이 ‘엄마, 젊은 여자, 창녀’ 세 가지 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게 그 때문이다. 젊은 역할을 하고 나면 엄마 역할을 맡기 전까지 30, 40대 배우들이 할 역할이 없다.”
-작품을 할 때 그런 부분들에 더 신경을 쓰게 되나.
이기쁨(이)=“그렇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가 여성들이 작품 전면에 나서 사회의 불평등과 통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데, 그 작품과 국내에서 젠더 문제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진 시기가 우연치 않게 겹쳤다. 그 후 더 의식적으로 찾아보고, 공부를 더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서=“이번에 올리는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가 체코 극작가의 작품인데 성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희곡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성중심적이더라. 중심인물은 남자고 고민도 오롯이 남자의 몫이다. 여자들의 심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스태프들과 토론을 많이 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면서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이기게 됐다. 여자 배우 선배들이 농담처럼 ‘여성 연출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얘기를 한다.”
부=“작품 바깥에서 더 민감하게 대응할 때가 있는데, 젊은 친구들이 외모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할 때다.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될 수 있다는 걸 지적한다.”
서=“10년 전에 좋았다고 생각한 작품도 지금 다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캐릭터나 상황들이 많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헬메르가 집을 뛰쳐나가는 건 동시대적이지만 그 전에 남편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정말 매력적으로 사회를 뒤집어 놓는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
-그런 작품이 지금은 없나.
전원=(침묵)
부=“여자가 세상을 바꾸는 해피엔딩이 없다. 아니면 바꾸다가 주인공이 죽는다.”
서=“무대 위에서 남자 배우들은 웃통을 벗기도 하는데, 여자 배우가 노출하는 건 여전히 성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멋진 여자 캐릭터가 노출을 하는 장면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시점이 오면 좋겠다.”
이=“개인적으로 무대에서 노출은 불편하다. 여자 배우의 전라 노출이 등장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먹고 살려니까 해야지’라고 말하는 걸 듣고 씁쓸했다. 노출이 꼭 필요하다는 게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배우는 그 팀에서 막내였다. 연출과 배우, 선배와 후배라는 위계에서 노출을 할 수밖에 없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연극계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받은 적은 없나.
이=“성별보단 나이로 인한 게 더 많았다. 물론 만연해 있는 분위기로 인해 스스로도 모르고 지냈을 수 있다. 여성 연출가기 때문에 작품이 섬세할 것이다, 그런 말들 자체가 성별을 구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서=“그냥 작품에 집중해서 만들었을 뿐인데 작품을 보고 나서 ‘남자 연출가인 줄 알았다. 너는 여자인데 남자 성향이 있다’와 같은 성별 고정관념이 들어간 말들은 많이 들었다.”
-그래도 여성 연출가들끼리 모여 젠더 이슈를 논의할 수 있지 않나.
서=“여성들은 남녀 구분짓기를 원하지 않는데 남성들은 그러려고 하다 보니 여성 스태프들도 거기 흡수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2015년 여성극작가전에 참여했다. 극작가와 여성 연출가의 연결은 있었지만 여성 연출가의 활동에 기여하는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없어 아쉬웠다.”
부=“어떤 이슈에 대해 모여서 작품을 하는 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을 주제로 페스티벌을 만들면 여자든 남자든 작품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여성극작가전, 여성연출가전으로 한정 짓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앞으로 연극계가 나아갈 방향은.
부=“한 동안 문단 내 성폭력이 화두였는데 연극계까지는 공론화가 되지 않았다. 위계질서 때문에도 그렇고, 성희롱과 성차별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워낙 협업을 하는 곳이라 말하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연출, 배우, 스태프 모두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것부터가 우선적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 창작자들이 자기검열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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