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가 인생을 바꿨다.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차려준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을 받고 감동한 인권운동가는 요리연구가가 되었다. 그 전에는 먹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알약 하나로 끼니를 때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10시간도 안 자고 일만 하는 일중독자였다.
“신세계를 만난 거죠. 그렇게 아름답게 차린 서양 요리는 본 적이 없으니까요. 깔끔한 당근 퓨레를 곁들인 메추라기 구이를 비롯해 따뜻한 음식 세 가지를 대접 받았는데, 잘생긴 셰프가 좁은 아파트 주방에서 오븐을 몇 번씩 열었다 닫았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해준 요리에 더없이 행복했죠.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요리가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며 하던 일 그만두고 오면 가르쳐주겠다고 하더군요. 1주일 만에 일 정리하고 가서 6년 동안 요리를 배웠죠.”
요리연구가 김단(51)은 미국 조지아주에 살 때 요리 스승 존을 만났다. 이웃집 한국인 여성의 남편인 존은 프렌치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였다. 당시 만삭이던 존의 아내가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해 김씨는 겉절이와 부침개를 해줬다. 그게 고마워서 존이 그를 집으로 초대해 정찬을 대접한 것이다. 존의 레스토랑에서 그는 요리와 주방의 모든 것을 배웠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자신이 뛰어난 미각을 갖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5년, 그의 요리 스튜디오는 경기 양평 도곡리의 허름한 농가다. 지난해 10월 이곳으로 왔다. 여러 해 동안 관리를 전혀 안 해서 쓰레기만 잔뜩 쌓인 채 무너져 가던 집을 매일 14시간씩 넉 달 간 손수 고치고 치워서 살고 있다. 외양간이던 곳은 10명 정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다이닝룸으로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 그는 음식과 요리로 만들어가는 더 좋은 세상을 꿈꾼다.
“밥차를 끌고 전국 방방곡곡 시위 현장을 다니며 맛있는 밥을 나눠주는 제 노년의 꿈이에요. 누구나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권리가 있잖아요. 밥차 하기 전에 여기서 요리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먹어보게 하고 교류하면서 음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삶을 나누는 일이다. 그는 음식으로 우정과 환대를 나누며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제가 생각하는 소셜 다이닝은 음식으로 사귀는 단순한 사교를 넘어 삶의 기쁨과 가치를 나누는 거에요. 음식을 매개로 삶을 이야기하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을 생각하는 거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교가 아니죠. 요리는 농부의 마음과 요리사의 정성에 먹는 사람의 마음이 합쳐져야 완성되는 거에요. 음식이 농부의 밭에서 식탁에 오기까지 과정에 관심을 갖고, 정성스런 음식으로 받은 환대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 그게 진짜 소셜 다이닝이죠.”
6월 한 달 간 그는 도곡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두머리부엌에서 팝업식당을 열었다. 양평 지역 귀농자들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식당 겸 카페인 이 곳에서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 멋진 음식을 내놓았다.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음식 문화를 소개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25일 그는 식재료를 대주는 이웃 농부를 팝업식당에 초대했다. 평생 농삿일로 허리가 90도로 꼬부라진 양승임(80) 할머니는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딸이 사준 꽃 달린 모자를 쓰고 식당에 왔다. 돼지고기 리에뜨와 완두콩 소스 광어구이를 대접받은 할머니는 “맛있어. 맛있어. 이렇게 좋은 음식은 처음 먹어보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나. 친구들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라며 좋아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이웃집 농부 김현숙씨에게는 콜리플라워 크림 소스 파스타를 대접했다. 완두콩은 할머니가, 콜리플라워는 김현숙씨가 재배한 것이다. 이날 할머니는 손수 키운 쪽파와 호박, 가지를 일일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왔다. 농부의 정성에 맛있는 음식으로 보답하는 요리사의 마음이 고마워서 챙겨온 선물이다. 양 할머니는 제초제와 농약을 영양제로 알고 살아왔지만, 유기농을 하는 현숙씨네 작물에 피해가 갈까 봐 무더위에도 비닐하우스 문을 꼭꼭 닫고 고추에 약을 친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1987년 미국으로 갔다. 그해 13대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나선 백기완 캠프에서 활동하다 블랙리스트에 오르자 가족들이 세 언니가 살고 있던 미국행을 권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진 윤한봉이 설립한 재미한국청년연합의 뉴욕 청년학교에서 한인 인권과 통일운동을 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8년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자녀들의 쉼터인 뉴욕 ‘무지개의 집’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아시아계 여성을 위한 미국 내 유일한 쉼터로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이 많고 일본, 필리핀 여성도 있던 그 곳에서 그는 텃밭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잔디밭을 갈아 엎어 텃밭을 만들고 텃밭 채소로 매주 한 차례 무지개의 집 아이들이 직접 요리를 했어요. 가정폭력에 상처 입은 엄마와 아이들이 텃밭을 가꾸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봤죠. 감정 기복이 심하고 화를 잘 내던 아이들이 차분해지더군요. 엄마와 아이가 다투면 벌로 텃밭 풀을 뽑게 했는데, 씩씩거리며 나갔다가 웃으면서 들어오는 거에요.”
한국에 돌아온 것은 건강이 나빠져서다. 과로로 몸이 상해 2년 사이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 귀국해서 처음 3년은 전북 장수에서 살았다. 밭농사를 지으면서 약초 산행도 하며 동서양 요리를 연구했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요리를 해서 내놓게 됐다. 지인들은 이 곳을 사람을 살리는 곳, ‘활인소’라 불렀다.
지금 살고 있는 양평 집에도 텃밭이 있다. 열 걸음도 안 되는 작은 밭에 요리에 쓸 꽃과 허브, 채소를 키운다. 일반 식재료는 농부의 밭에 가서 직접 뽑아온다. 작물을 솎아내고 풀을 매면서 크고 매끈하니 잘생긴 것은 상품으로 팔게 놔두고 못난이나 작은 것을 가져다 쓴다. 그의 요리는 농부의 밭에서 나온다. 요리에 맞춰 식재료를 구하는 게 아니라 식재료에 맞춰 요리한다. 농부의 밭을 둘러보고 수확 시기가 된 재료를 가져다 집에 와서 레시피를 작성한다.
그의 요리는 숫제 중노동이다. 소스 만들기부터 훈연까지 사서 쓰지 않고 직접 하니 시간이 한참 걸릴 수밖에 없다. 조수가 많아도 힘든 게 주방 일인데 김단 특유의 느리고 고된 요리를 하려는 문하생이 없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혼자 하느라 더욱 고단하다. “젊은 친구들과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고 음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를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 불광동의 서울혁신파크 맛동에서 하는 가나다밥상은 그가 생각하는 소셜 다이닝과 좋은 요리를 위한 자리다. 맛동은 음식을 주제로 사회 혁신을 제안하는 공간이고, 가나다밥상은 ‘가치를 나누는 다양한 밥상’을 가리킨다. 매주 목요일 요리 연구가와 셰프가 번갈아 와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가치를 전하는 이 자리에 김단은 5월과 6월, 세 차례 참가했다. 14가지 채소와 과일, 견과류를 얹어 밥 위에 꽃밭을 차린 브릴리언트 라이스를 시작으로 꺼먹돼지고기와 영양밥, 토종닭 온반, 제철과일로 맛을 낸 두루치기 쌈밥을 내놓았다. 이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전날 세 시간 밖에 잠을 못 자고 재료를 다듬고 손질했다. 소스 하나도 직접 만들어 쓰는 고집스런 셰프답게 돼지고기도 도곡리 집 마당에서 종일 훈연해서 가져다 썼다.
좋은 사람, 좋은 식재료, 좋은 그릇을 만나면 요리를 하고 싶어진다는 그의 요리는 건강할 뿐 아니라 먹기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자투리 채소도 장식으로 쓴다든지 해서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거둔다. 그런 정성이야말로 사람과 삶을 정성스레 받드는 태도일 것이다. 글ㆍ사진=오미환기자 mhoh@hankook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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