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 하기엔 조금 이른, 그렇다고 겨울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던 3월 2일 오후. 인근에서 재력가로 손꼽히는 한명호(81·가명)씨와 손자 승철(30·가명)씨가 경기 양주시 2층짜리 전원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층 작은방, 잿더미에 뒤덮인 시신. 얼핏 보기엔 화재로 인한 사망이었지만, 그들 몸에 남겨진 흔적들은 ‘타살’을 말하고 있었다. “명호씨는 갈비뼈 여러 개가 부러져 나가면서 장기를 찌른 상태였고, 승철씨는 두개골이 골절돼 있었다. 질식 사망은 그 이후로 보인다.”
오후 3시, 윤광상(54) 경기북부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을 가득 메운 후끈한 열기가 윤 계장을 덮쳤다. 이날 양주 낮 최고 기온은 9도. 바깥의 쌀쌀함은, 내부의 후텁지근함을 배가 시켰다. “완전 사우나네. 사우나야.”
현장이 보인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불길함이 윤 계장 머리 속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범인이 지른 것으로 보이는 불로 집안 공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고, 보일러도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화재 열기와 보일러 난방이 더해진 집 안 온도는 체감상 40도 이상이었다. 윤 계장은 “반갑지 않은 온기였다”고 했다. 수사 단서들이 뜨거운 열에 약하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문은 고온에서 수분이 증발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몸에 남겨진 흔적은 ‘타살’
화재 열기에 지문 등 단서 희미
현장을 둘러볼수록 윤 계장 이마에 주름은 깊어졌다. 주름 사이에 땀방울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쌀쌀한 날씨였어도, 창문을 포함한 모든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게 무엇보다 예사롭지 않았다. ‘집안 온도를 높이려고 불을 지르면서 일부러 문을 다 닫은 걸까.’ 그랬다면, 범인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지문 같은 흔적을 없애는 동시에, 외부인이 화재 신고를 하지 못하게 연기가 빠져나가는 걸 막겠다는, 치밀한 계산에 따른 행동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틀린 적이 없다. 사건 현장엔 의문점만 잔뜩 남아있었다. 집 안은 시커멓게 그을린 화재 흔적투성인데, 외부는 너무나 멀쩡했다. 동네 사람들 누구도 ‘사람이 둘이나 죽어나간 사건’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집 안팎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도, 이렇다 할 목격자도 없었다. 명호씨 둘째 딸 소영(59·가명)씨는 경찰에서 “2월 26일부터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도대체 언제 벌어진 사건이라는 거야?” 누구도 답을 내놓기 어려웠다. 사건 현장 건너편 섬유공장에 설치된 CCTV 화면 4개는 어느 것 하나 현장을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 하늘은 짙은 구름에 가려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당까지 포함 330㎡(100평)가 넘는 공간을 폴리스라인으로 묶어두고, 흔적을 찾아 나서고 있는 과학수사요원들에게 윤 계장이 소리를 쳤다. “비까지 오면 끝이야, 서두르자고!” 비가 내려 집 주변을 적신다면 지문 같은 단서가 집 주변에서 나올 확률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상대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사팀 내부에서 몇몇 가설이 제시됐다. 농축된 수사 경험에 기반한, 밑그림이었다. 가족 내 누군가 이들을 살해한 후 증거를 숨기기 위해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첫 번째, 사망한 한씨가 소문난 재력가였다는 점에서 금전 탈취를 목적으로 벌인 강도 살인 가능성이 두 번째였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손자 승철씨가 할아버지 재산을 노리고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이었다.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했다지만 추정은 추정일 뿐, 가설은 금세 허물어졌다. 집안에 쌓인 재를 걷어내자, 선명한 혈흔족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을 지르려고 안방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현관문 쪽 거실로 이동하면서 남긴 흔적이었다. 윤 계장 등이 신발장을 포함해 집 안에 있던 50여 개 신발 바닥과 일일이 대조를 했다. 손자가 범인이라면, 분명 일치하는 신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론은, ‘손자 신발과 족적은 맞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할아버지가 3대 독자인 손자를 끔찍이 아꼈고 손자 역시 할아버지를 특히 좋아했다”는 진술이 있었다.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든든한 경제적 지원자였는데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증언도 나왔다. “양주에서 아버지(한명호씨)를 모시고 살던 승철씨 부모가 직장과 가까운 동두천으로 이사 갈 때도 승철씨만큼은 할아버지와 살겠다며 양주에 남았을 정도”로 둘은 각별했다. 손자는 범인이 아니었다.
수사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단서를 빨리 찾아야 했다. 이때 윤 계장이 “열 때문에 단서들이 날아간 거라면, 온기가 닿지 않은 ‘열(熱) 사각지대’를 뒤져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실제 지면과 맞닿은 상자 바닥이나, 냉장고 안 식기 등 밀폐된 공간에 있던 물건에서 형태가 온전한 지문이 나타난 경우가 있었다.
역시나 냉장고에 있던 콜라병과 장롱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패물함 등에서 지문이 10개 정도 무더기로 발견됐다. 열 손상으로 훼손된 것을 제외하고, 감정이 가능한 지문이 6개나 됐다. 지문은 곧바로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관 증거분석실로 보내졌다. 사망 추정 시간도 어느 정도 좁혀졌다. 승철씨 휴대폰 분석 결과, 2월 27일 낮 12시쯤 피자를 주문한 통화 내역이 발견됐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얘기다.
3시간 후, 지문 결과가 수사팀에 전해졌다. 희망을 걸었지만, 지문 주인은 피해자와 가족들이었다. 죽은 이들을 제외한 가족, 즉 명호씨 세 자녀는 모두 27일 이후 양주에 온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밤새 마을회관 등 사건 현장 주변에 있던 CCTV 9대에 기록된 나흘 치(2월 27일~3월 2일) 기록을 꼼꼼하게 뒤진 강력팀원들도, 운동장 같은 전원주택 안팎을 모두 훑어 보던 과학수사요원도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아직 범인은 윤곽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여기 지문이 있어요!”
“여기 지문이 있어요. 두 개요, 두 개!” 침묵을 깨는 고함 소리가 현장을 뒤흔들었다. 현관문 앞 난간에 지문 채취용 분말가루를 묻히고 있던 권종인(43) 형사였다. 수사 개시 24시간 만에 열 손상을 입지 않았을, 집 밖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지문이었다. 긴급 지문감정을 의뢰한 윤 계장은 그제서야 종일 참았던 담배를 한 대 물며 되뇌었다. 예감이 좋았다.
오후 6시쯤, 윤 계장 휴대폰이 울렸다. 지문감식 결과였다. ‘서상진(가명), 나이 29세, 경기 고양시 행신동 거주.’ 용의선상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었다. 난간에서 건진 지문 두 개는 서씨 오른손 중지와 약지 흔적이었다. 이 중 중지가 남긴 지문만이 식별이 가능했다. 지문이 서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서씨는 손자 승철씨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최근 서로 연락을 했던 흔적은 없었다. 경찰이 주목한 건, 얼마 전 승철씨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글이었다. 사망 며칠 전 1,000만원이 넘는 명품 시계와 달러화 뭉치, 차량 사진 등을 게시하면서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일종의 재력 과시, 게시물에는 집주소까지 ‘친절하게’ 공개돼 있었다.
경찰은 곧장 서씨 집(고양시 행신동)으로 이동해 잠복에 들어갔다. 허탕이었다. 이튿날인 4일 오전 수사팀은 아예 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씨는 사설 스포츠토토를 하다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혐의로 몇 달 전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추가로 물어볼 게 있다”는 경찰 제안을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고지가 눈 앞에 보이면서, 수사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씨는 끝내 수사팀을 찾아오지 않았다. 수사팀 사이에서는 “일부러 안 온 건지, 못 온 건지는 모르겠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오전 11시쯤, 양주 시내에서 장흥파출소로 향하던 서씨 차량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7톤 대형트럭과 정면 충돌했다. 서씨는 의식을 잃었고, 경찰은 충격에 휩싸였다. 사고 조사 결과 그는 작심한 듯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중앙선을 완전히 넘어가 트럭을 들이받았다. 고의성이 짙었다.
경찰은 서씨가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추가 조사에 박차를 가했다. ‘지문 주인’ 서씨를 용의자로 특정하니, 퍼즐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2월 28일 오후 3시16분쯤, 서씨 아버지가 소유한 흰색 외제승용차가 사건 현장 쪽으로 들어왔다 3시50분쯤 나가는 모습이 인근 마을회관 CCTV에 포착됐다. 이 외제차는 오후 5시쯤에도 사건현장 인근 유치원 CCTV 화면에 찍혔다.
친구 명품시계ㆍ금품 노리고…
행적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이날 오전 서씨가 아버지 소유 흰색 외제차를 몰고 인천 송도(아버지 거주지)에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때 신었던 신발을 구해 대조해 보니 사건 현장에서 나온 혈흔족적과 정확히 일치했다. 2일엔 중고물품 거래사이트를 통해 최모(32)씨에게 고가의 시계를 팔아 넘기고 700만원을 입금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보증서 조회 결과, 시계는 승철씨가 재작년 7월 서울 강남 한 백화점에서 1,400만원 정도를 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윤 계장은 “어쩌면 영원히 봉인될 뻔한 진실의 문이, 지문이란 열쇠 하나로 열린 셈”이라고 했다.
서씨는 범행 동기와 목적 등 숱한 비밀을 남긴 채 교통사고 약 10시간만인 오후 8시, 결국 숨을 거뒀다. 이후 서씨가 살인방화 사건 당일 몰았던 차량 가속페달에서 피해자 승철씨 DNA가 추가로 발견됐다. “왜 그랬습니까” 경찰도, 피해자 가족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용의자 서씨는 피해자 승철씨가 SNS에 올린 시계 등 금품을 노리고 범행을 계획했을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 사망 원인과 사건 당일 서씨 행적 등을 종합해보면, 서씨는 명호씨를 먼저 살해한 뒤 2층 자신의 방에서 내려온 승철씨를 제압하고 안방에 있던 이불을 거실로 가지고 나와 불을 붙였다. 경찰은 이 같은 최종 보고서를 남긴 채,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했다.
양주=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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