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이야기를 전달할 때 그 사람의 생김새는 가장 중요한 정보 중 하나다.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코의 형태는 어떠한지, 이마는 튀어나왔는지, 키는 큰지 작은지… 지금 당장 주변에 있는 세계 명작을 펼쳐보라. 작가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주인공들의 표정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펼쳐 나가려면 세계를 구축해야 하고, 그 기초를 다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물 묘사다. 현대소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소설 속 인물의 표정을 묘사하는 분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이제 인물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대신 옷이나 액세서리나 신발과 가방을 설명한다. 인물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가 잘 아는 누군가와 곧장 비교해버린다. “그는 마이클 조던과 버락 오바마를 적당히 섞어놓은 것 같은 외모의 남자였다”라고 써놓으면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상상한다.
‘서브텍스트 읽기’를 쓴 찰스 벡스터는 소설에서 인물 묘사가 줄어드는 것을 영화와 TV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얼굴 묘사는 초상화법이 사진촬영에 의해 강탈되었듯, 영화나 TV에서 부정하게 사용되었다. 이들은 대개 배우들이다. 영화나 TV에서 보게 되는 얼굴 대부분은 역할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움은 마케팅이나 배우 노릇으로 오염되었다.”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순간 우리는 배우의 역할과 특정 표정, 웃음, 울음, 찡그림, 제스처를 함께 저장한다.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완성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슬픈 표정을 상상하려고 할 때,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아닌 텔레비전 속 배우의 인상 깊었던 연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위대한 배우는 ‘전형’을 뛰어넘는다. 인간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 감정의 표현이 같을 리 없다. 위대한 배우는 이전까지 쌓였던 수많은 배우들의 흔적을 지워내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각인된 것들을 편평하게 한 다음 전혀 새로운 무늬를 아로새긴다. 그런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명단의 첫 줄에는 반드시 ‘이사벨 위페르’의 이름이 새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개봉한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는 위페르의 엄청난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모든 위선을 깨부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감정을 뒤집는다. 놀라운 것은 얼굴의 표정만으로 그 모든 전복을 이뤄낸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슬쩍 웃는다. 어머니에게는 무표정한 얼굴로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한다. 직원에게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여기 보스는 나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위페르의 입꼬리야말로 소설가의 펜과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미세한 입꼬리의 이동만으로 비난과 경멸과 만족과 행복을 표현할 수 있다.
미하넬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에서 피아노 선생 에리카 코후트로 등장하는 위페르는 음악과 침묵과 언어를 미세한 표정만으로 설명한다. 누군가의 연주를 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한 개의 명확한 감정과 그에 따른 열 가지의 부수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코후트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넌 바흐나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에게 한 가지 접근법 밖엔 없구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에서 그녀는 철학 교수 나탈리를 연기한다. 나탈리는 수십 년 동안의 피로감이 몸에 묻어 있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이라 생각했던 일상이 실은 권태였을 때, 그녀의 무표정이 실은 무표정이 아니었단 사실을 관객은 뒤늦게 깨닫게 된다. 초보 배우들에게 감정의 단계가 열 개라면, 위페르에게는 백 단계쯤 있는 게 아닐까. 나탈리는 감정으로 이미 모든 정보를 전달한 다음 대사로 방점을 찍는다. 이번에는 브람스와 슈만을 인용한다. “20년 동안 브람스와 슈만만 들었어. 지겨웠어.”
돈 드릴로의 소설 ‘마오 II’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는 소년이 문가에 서 있는 것을 알았고 그가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면서 피부, 눈, 이목구비, 얼굴이라고 부르는 외양의 측면을 언어로 표현해보려고 애썼다. 만일 그에게 얼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만일 저 후드 아래에 실제로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우리가 믿는다면.” 소설가들은 여전히 몇 개 안되는 단어와 문장으로 인간의 얼굴을 묘사하려 애쓰고 있다. 그 아래에 실제로 무엇인가 존재하고, 그 존재가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소설가들의 바람과는 달리 얼굴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위페르가 추구하는 연기는, 어쩌면 소설이 추구하는 방향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 문장이 가 닿을 수 없는 감정, 숨길 수 없는 감정의 융기, 입꼬리의 방향이 가리키는 감정의 불확실성, 그럼에도 끝까지 써내려 가야만 하고, 표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그녀의 표정 연기는 구글맵이 아니라 에스키모들이 직접 손으로 깎아서 만든 나무 지도다. 정확한 좌표는 없으며, 우리는 나무의 윤곽을 더듬으면서 그녀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 가끔 그게 더 정확하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