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빵을 샀다//반만 먹고/반은 할머니 드리려고/남겼다//할머니는 이빨이/반만 있으니까”. 최수진의 동시 ‘반만 먹었다’이다. 빵을 사 먹고 반은 할머니에게 주려고 남긴 것은 할머니를 생각하는 기특한 마음 같지만, 이 동시 속의 아이는 단지 할머니는 이빨이 반만 있어서 반을 남겼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재치 있는 핑계라 하겠는데, 빵을 사 먹으며 할머니를 생각한 마음이 경쾌하게 드러난다. 할머니도 먹고 싶을 거라든가 할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주어서라든가 이런 생각이 안 나고 할머니의 거지반 빠진 이가 생각났으니 나이 어린 아이답다. 빵을 남겨 가긴 해야 하는데 얼마를 남겨야 하나, 자기 나름대로 명쾌하게 기준을 찾았으니 그것도 깜찍하다.
‘저울’의 아이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양손에 나눠 들고 어느 것이 큰지 재고 있다. 꼭 큰 것을 찾아 먹어야 하니까. 언니의 시선에는 동생이 척척 무게를 가늠해 내는 것이 신기하다. “동생은 저울이에요/무게를 너무 잘 달아요” 하고 감탄한다. 아이들의 탐욕이나 시샘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개미의 일기’라는 작품에서는 “낙엽이 푹/커다란 발이 쿵/꽃잎이 살짝/절레절레, 휴~/그래도 과자 하나는 들고/집으로 왔다”라고 개미가 되어 말하고 있는데, 그 감수성은 앞의 시들과 다름없다. 아슬아슬 조마조마한 상황을 다행히 모면하고 안도하며 먹이를 확보해 돌아온 개미의 일과가 눈앞에 좌르르 펼쳐진다.
비유와 상상이 뛰어난 시, 철학적 깊이가 있는 시, 직관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읽어 낸 시 등 동시에 여러 차원이 있고, 어른들이 음미하며 읽을 좋은 동시도 요즘 많이 발표된다. 그렇지만 ‘저울’처럼 자의식이 자라기 전 아이의 단순하고 명쾌한 의지와 행동을 드러낸 작품은 그것대로 또 매력이 있다. 사실 동시를 쓰는 이는 어른이어서, 그렇게 쓰기가 쉽지 않다, 어른에게 형성돼 있는 온갖 복합적 지식과 감성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주요 공직자 후보자들이 국회 청문회를 거쳤다. 낙마한 인사도 없지 않은데, 문제된 사안들을 보면 그때그때 큰 것, 유리한 것을 정당성을 무시하고 선택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된 과거사가 발목을 잡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저울질하던 아이는 자라서 어떤 저울질을 할까. 사는 일이 늘 명경지수 같을 수야 없지만, 유능하고 청렴한 인물들이 존경받고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로 성큼 나아가길 바란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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