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를 외치면 옆 사람이 공을 던져 줄 거야, 그럼 그 공을 받아 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면 돼!” “패스! 패스” “받아!”
서울 한남대교와 동호대교 사이에 펼쳐진 4,000여 평에 달하는 드넓은 잔디밭. 좌우에 럭비 골대가 박혀 있는 트랙구장에 가면 목이 쉬어라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 대한럭비협회 선수위원회 부위원장 이기찬(46)씨다. 이씨는 매주 화요일 오전 강남구 복지관 소속 발달장애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이곳에서 럭비를 가르친다. 국제 스포츠기구인 월드럭비 공인 에듀케이터이기도 한 그는 올 6월부터 장애인들에게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지난 4일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럭비 경기는 손과 발을 동시에 이용하고 공을 왼쪽으로 줄지, 오른쪽으로 줄지 순간판단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신체활동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나서 좋습니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에게 럭비가 생소했고, 몸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표정도 한층 밝아지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하는 럭비는 일반 럭비의 변형인 ‘터치럭비’다. 럭비를 하다 보면 몰(공격수 주위의 양 팀 선수가 선 채로 몸을 밀착시켜 밀집한 상태)과 럭(선수들이 태클을 하다 서로 밀쳐 공을 떨어뜨렸을 때 그 공을 차지하려고 다가선 양 팀 선수들의 무리)때문에 몸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터치럭비는 이런 위험요소를 제거한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부상위험이 적어 어린이ㆍ장년층 등 입문자들이 즐겨 한다.
“터치럭비는 성인들의 럭비 규칙을 변형해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에요. 럭비공을 갖고 있는 공격수의 신체를 터치하기만 하면 태클을 당한 걸로 간주하죠. 마치 ‘얼음 땡 놀이’와 비슷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국제 대회에 초청받는 나름의 결실도 이뤘다. 이씨가 복지관 장애인들과의 럭비교육 내용을 월드럭비 국제 연맹에 보고했더니 호주에서 매년 열리는 장애인럭비대회 초청권이 날아온 것이다. “경기를 하다 보면 얼굴에 볼을 맞기 일쑤에요. 그래도 처음에는 패스도 안 되던 이들을 가르치면서 패스, 런닝 등 한 단계씩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뿌듯합니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격이라서 올해 대회에 나가지는 못 하지만, 내년을 목표로 꾸준히 기량을 쌓아나갈 겁니다.”
이기찬씨는 중ㆍ고교때까지 럭비 선수였으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운동을 그만뒀다. “선ㆍ후배 간 위계질서가 너무 싫어서 고교 졸업 후 운동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고교 졸업식도 안 갈 만큼 도망치고 싶었죠.”
그는 1989년 고교 졸업 이후 17년 동안 럭비를 잊고 있었다. “어느 날 고교 친구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어요. 동문 친선경기를 하러 대만에 가는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추억 삼아 가겠다고 했죠. 2006년이었어요.” 결과는 참패였다. 그 뿐 아니라 선수시절 기량을 믿고 무리한 동작을 구사하다가 부상까지 입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외국에서 바라본 활발하고 자연스러운 럭비 문화가 부러워졌다. 이듬해 홍콩에서 열린 2007 세계 럭비 세븐즈(7인제 경기 대회)를 관람하러 갔다가 치른 일본과의 동문 친선 경기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기가 생겼고, 1년 뒤에는 반드시 되갚아주리라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와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주말마다 럭비 연습을 열었다. 인터넷에 모임을 알리는 글을 올렸더니 첫 모임에 3명이 모였다. 그 때부터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매주 일요일 오전마다 모여 패스를 주고받으며 달렸다.
하지만 제도권 밖에 있으니 문제점이 많았다. 럭비를 즐길 장소를 찾는 것부터 험난했다. 운동장 관리인들은 럭비 얘기만 꺼내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강남구 생활체육회의 문을 두드렸고 어렵사리 정회원 자격을 얻어냈다. 정식 단체로 인정받고 나니 막상 전국에 흩어져 있던 럭비동호인들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면 대회를 개최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이씨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사비 300만원을 들여 제1회 한국 럭비동호인 대회를 개최했다. 3명이 모여 시작한 럭비연습이 10개팀 100여명이 참가하는 대회로 발전하기까지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운동장 한 가운데 주먹만한 돌멩이가 널려 있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지만 너무 즐거웠어요. 럭비공 하나로 화합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죠. 럭비가 이런 건데, 왜 우리는 안 됐을까 생각했죠. 환경만 조성되면 럭비도 충분히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운동이 되겠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게 계기가 돼 지금까지 왔죠.”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2006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구상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의도한강공원 일대가 요트, 레저 등을 즐기는 거점으로 탈바꿈할 예정이었다. 수도권 유일의 럭비구장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이씨는 한강사업본부와 대한럭비협회를 발로 뛰며 사정을 설명했다. 두 달 동안 직접 대체부지를 물색하며 제안한 끝에 지금의 잠원 한강공원 트랙구장을 럭비 구장으로 쓸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럭비를 보급하겠다는 꿈을 위해 7년간 준비한 끝에 지난해에는 월드럭비에서 인정하는 에듀케이터 자격증도 취득했다. 럭비 지도자를 양성하고 럭비를 보급할 뿐 아니라 럭비 지도자에게 라이선스도 발급할 수 있는 역할이다. 국내에서는 9명밖에 없다. 그는 “국제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오로지 영어로 돼 있어서 힘들었어요”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의 꿈은 럭비의 대중화다. “보통 학교 끝나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집에 가잖아요. 왜 학교 끝나고 럭비 패싱게임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조기 축구는 있는데, 조기 럭비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하죠.” 일선 학교, 종합사회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 쉬지 않고 부지런히 럭비를 보급한 결과 그는 올해에만 1,300명의 입문자들과 패스를 주고받았다.
“럭비는 겉으로만 보면 거친 경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알고 보면 가장 신사적인 스포츠에요. 럭비에는 ‘노 사이드’(No side)라는 말이 있는데, 경쟁 상대였던 양 팀이 경기 종료 후에는 편가름 없이 친구가 된다는 의미죠. 제 꿈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노 사이드’ 정신을 퍼뜨리는 겁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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