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多讀)으로 유명한 김연수 소설가는 ‘책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스테디셀러 ‘청춘의 문장들’을 비롯해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등은 동료들의 문장을 인용하며, 작가가 겪은 일화와 단상을 함께 엮은 책들이다. 등단 후 근 10년 간 천착한 소설의 소재는 ‘쓴다는 것’이었다. 장편 ‘굳빠이 이상’(2001)을 비롯해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까지 이 시기 발표된 상당수 소설이 ‘쓴다는 자의식’을 드러낸 작품들로 묶을 수 있다.
작가가 출판저널에서 근무하며 썼던 서평과 확연히 다르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김 소설가의 집필 방식은 기존 1970~80년대 작가들과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화자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나서, 그 화자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책을 통해 찾는다. 예컨대 화자가 1930년대 만주 항일운동가라면 ‘30년대 사람의 감각’으로 커피 맛을 묘사할 정도가 될 때까지 관련 책을 찾아 읽는 식이다. 장편 ‘밤은 노래한다’를 쓰며 1년간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 필사본과 독립운동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김 작가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봐야 하기 때문에 잡다한 자료까지 다 본다. 모든 정보를 화자한테 밀어 넣은 뒤에 이 사람의 경험과 화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서를 통해 소재를 찾고, 취재하는 창작 기법을 비평계에서 흔히 ‘문헌정보학적 상상력’이라고 일컫는다.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으로 일반에 널리 알려진 한강, 최근 소설집을 낸 김애란 등의 대표작 끝에도 참고문헌이 어김없이 주석처럼 붙는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작가는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 재너 레빈의 ‘우주의 점’, 칼 세이건의 ‘에필로그’, 우이환의 ‘여백의 예술’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김애란은 최근 본보 인터뷰에서 “단편 ‘노찬성과 에반’을 쓰며 한국일보 ‘고은경의 반려배려’를 6개월간 정독했다”고 밝혔다.
오창은 문학평론가는 한국전쟁, 유신 독재 등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활동한 1970~80년대에 ‘경험의 가공’이 한국 소설의 대세를 이루었다면 이후 문학, 영화 등 가상의 세계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문헌학적 전통은 인문주의의 근본이지만 작가가 어떤 책을 읽느냐, 즉 작가의 독서 자체가 작품의 경향을 형성하는 것이 작가들의 특징이다. 김연수를 비롯해 김영하, 박성원, 백민석, 이응준 등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발표한 ‘생활의 잉여로서의 문화’(최인훈) 세대가 등장하면서부터 가시화돼 현재까지 이어진다.
오 평론가는 “(이들 작품은) 작품의 배경을 ‘공부하며’ 인문학적 깊이를 소설에 담보해내면서 근대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친다”며 “대규모 독자는 아니라도 작가를 신뢰하는, 충성도 높은 독자군이 형성되는 지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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