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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흑인 여성 작가, 주류의 시선이 놓친 것을 상상하다

입력
2017.07.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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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옥타비아 버틀러

#1

빈곤층 흑인 가정부의 내성적 딸

용돈 모아 처음 산 책 천문학서적

전문대 거쳐 30대 초반 작가 돼

백인 남성 전유물 SF에 새 관점

#2

외계의 시각에서 본 인간보고서

애증 통해 자기모순적 존재 탐구

인류의 역사와 진보 통찰케 해

지적 유희서 공감으로 SF 확장

2003년 2월,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시에서는 시민들에게 한 권의 책을 추천해 감상을 나누는 행사를 열었다. 독서 토론은 물론, 강연, 시각예술 전시, 관련 영화 감상, 시 낭송회 등등의 행사가 대학과 도서관, 지역 주민센터, 서점 등에서 한 달간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4만 명 이상의 사람이 이 책을 읽었는데 이는 로체스터 시민 다섯 명 중 한 명꼴이었다.

이들이 모두 함께 읽은 책은 흑인 여성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장편소설 ‘킨’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빚어진 스토리텔링을 통해 미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성찰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독자에게 사회의 진보에 대한 의지와 자부심까지 불어넣어 주는 명작이다. 1979년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지역 도서관 등의 추천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SF는 가장 광활한 상상력의 폭을 과시하는 장르지만, 백인 남성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가 없지 않았다. 가난한 흑인 여성이라는 비주류 작가의 정체성이 그 한계를 열어졎힐 수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SF는 가장 광활한 상상력의 폭을 과시하는 장르지만, 백인 남성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가 없지 않았다. 가난한 흑인 여성이라는 비주류 작가의 정체성이 그 한계를 열어졎힐 수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SF 상상력의 새 지평을 열다

‘킨’의 주인공은 백인 남성과 결혼한 흑인 여성이다.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단란하게 젊은 부부의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주인공은 갑자기 시공간의 틈에 빨려들어 낯선 곳에 떨어졌다가 익사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해 준다. 그런데 그 백인 남자아이와 가족들이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 알고 보니 그곳은 19세기 초의 미국, 흑인 노예제도가 엄존하던 시대였다.

그 뒤로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과거로 날아가는 일을 계속 겪으면서 때로는 몇 달이나 몇 년을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가 과거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노예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과거로 갈 때마다 만나는 백인 남자아이 및 그 주변의 백인과 흑인들은 충격적인 비밀을 안고 있었다. 주인공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오랫동안 거친 끝에 서서히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에게 남는 여운은 무척 강렬하다. 미국인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백인, 흑인, 여성, 남성들이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이 작품에서 깊은 울림을 느낄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작가로 데뷔한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SF 창작은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작품에 반영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도 한계가 있었다. 다른 시공간에 대한 상상,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감, 그리고 그를 통한 현실의 반추 등 SF적 상상력의 미덕이 잘 드러나는 명작들이 꾸준히 나왔지만 엄밀히 따지면 백인과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랬던 SF적 상상력의 한계를 깨뜨린 작가가 버틀러이다.

소설 ‘킨’에서 백인 남성과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주인공 흑인 여성은 노예제가 버젓이 존재하는 19세기 초로 시간여행을 겪으며 차별과 억압을 자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소설 ‘킨’에서 백인 남성과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주인공 흑인 여성은 노예제가 버젓이 존재하는 19세기 초로 시간여행을 겪으며 차별과 억압을 자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비주류의 틀을 뛰어 넘다

버틀러가 청소년일 때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조차 ‘흑인 여성은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만류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SF라는 비주류 장르로 성공하기는 더더욱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버틀러 이전에 SF 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은 흑인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벨-17’의 작가인 새뮤얼 딜레이니 한 명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넉넉한 집안 환경에서 자라 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하고 일찍부터 문화예술 다방면에 비범한 재능을 보인 남성으로서, 흑인이라는 점만 빼면 버틀러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반면 버틀러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모든 적대적인 환경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기어이 작가로서 성공했으며, 특히 SF분야에 독보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작품들을 읽은 SF 독자는 현실 역사의 부조리를 겪는 직접적인 당사자,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을 새삼 자각하면서 이를 통해 SF적 상상력의 외연이 더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전까지 SF적 상상력은 주로 지적 유희의 측면에서 향유해 왔지만, 버틀러는 서로 다른 존재들간의 정서적 공감과 소통이라는 접근법을 일깨웠던 것이다.

대표작 ‘킨’이 타임슬립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성찰을 새로운 시각으로 유도했다면, 그의 단편 ‘블러드 차일드’는 외계인과 그에 종속된 인간이라는 확장된 상상으로 같은 주제를 변주한 수작이다. 90년대 중반 국내에 출간된 한 단편집에 수록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이름을 알렸던 이 단편은 노예제도라는 인류 역사의 치부를 SF적으로 재해석한 탁월한 메타포로서 주목받았다. 그런데 근년 들어 새롭게 번역된 작품집 ‘블러드 차일드’에 실린 에세이에 따르면, 정작 버틀러 본인은 노예제에 대한 은유보다는 인간과 외계인의 기묘한 동거라는 설정 그대로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구해본 측면이 크다고 밝혔다. 즉, 자신의 모든 작품을 ‘흑인 여성 SF 작가’라는 틀로만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1965년 미 로스앤젤레스 와츠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발단이 돼 흑인 폭동이 일어나 6일간 34명이 사망했다. 이 와츠폭동 후 인종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작가협회가 열었던 무료 작가 워크숍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작가가 될 기회를 얻었다. 위키미디어
1965년 미 로스앤젤레스 와츠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발단이 돼 흑인 폭동이 일어나 6일간 34명이 사망했다. 이 와츠폭동 후 인종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작가협회가 열었던 무료 작가 워크숍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작가가 될 기회를 얻었다. 위키미디어

우주를 향한 동경, SF의 본질

버틀러가 SF 작가로서 뛰어난 점은 ‘흑인 여성’이라는 불리한 환경을 작가로 성공하는 전화위복의 요소로 삼았으면서도 결코 그것에 안주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성별이나 인종 이전에 미지의 우주를 동경하는 한 인간으로서 원초적 상상력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키워왔다. 그가 쓴 에세이에 따르면 어린 시절 가난한 형편에서도 용돈을 모아 처음 서점에 갔을 때, 제일 먼저 구입한 책들 중 하나가 천문학 서적이었다. 이 장면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닌 또 다른 SF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콘택트’를 쓴 과학자 칼 세이건이다. 세이건이 어린 시절 처음으로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요청한 책도 천문학 서적이었다. 이 때 세이건이 ‘스타’에 관한 책을 달라고 했더니 연예인에 관한 서적을 먼저 꺼내주더라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1940년대 미국 동부의 백인 소년 세이건과 1950년대 미국 서부의 흑인 소녀 버틀러는 크게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SF의 원초적 동기인 우주와 별들을 향한 동경, 그리고 다른 세계와 다른 존재에 대한 상상이라는 견고한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스토리텔링으로 형상화하고 싶다는 욕망에 관한 한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버틀러의 작품세계를 성별과 인종적 맥락으로만 해석하려는 관점은 오히려 역차별적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더 열린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버틀러라는 작가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버틀러의 작품들에는 일관되게 감지되는 한 가지 정서적 특징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외계의 지적 존재가 본다면 인간을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류학 보고서 같은 이야기들이다. 인간의 생태학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의 계몽과 진보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 통찰을 버틀러는 ‘애증’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감정을 통해 탐구한다. 사실상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코드인 ‘애증’은 인간 그 자체가 자기모순적인 존재임을 웅변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버틀러만큼 여기에 천착한 SF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 애증이라는 모순적 정서로 탄탄하게 형성된 관계. 이것이 버틀러 작품세계의 핵심이며, SF적 상상력에 독특한 층위를 더한 비결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옥타비아 버틀러

1947년 6월 22일~2006년 2월 24일. 미국의 SF 작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흑인 빈곤층 집안에서 외동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구두닦이였던 아버지를 잃은 뒤 어머니 및 독실한 기독교도인 할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하녀 일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백인 집에 드나들며 인종차별을 경험했으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가져오던 버려진 책들을 쌓아놓고 계속 읽었고 도서관에서도 책을 읽거나 습작에 몰두하다 10세 때 어머니를 졸라 타자기를 장만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지역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작품을 써서 마침내 30대 초반에 작가로 자리 잡았다. 휴고상 및 네뷸러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딴 창작 기금이 설립되고 2010년에는 SF 및 판타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대표작으로 ‘킨’ ‘블러드차일드’ 외에 ‘야생종’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소개된 책>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비채 발행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비채 발행

야생종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영 옮김

오멜라스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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