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간판 두 점포’
왼쪽은 ‘현대 열쇠 병원’ 오른쪽은 ‘사북 칼국수’, 갈라지고 색 바랜 간판을 두 점포가 사이 좋게 나누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마주친 ‘한 간판 두 점포’의 역사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 돈 때문이었다. 열쇠 수리점을 운영하는 김종열(66)씨는 당시 디지털 잠금 장치의 등장으로 수익이 줄어들자 임대료 지출이 부담스러웠다. 마침 푼돈이라도 벌어 보려 자그마한 식당 자리를 찾던 이옥자(71)씨가 나타났고, 4평 남짓한 공간을 쪼개 쓰기 시작했다. 당시 먹고 살기도 팍팍한 이들에게 새 간판을 따로 만들어 다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궁리 끝에 기다란 간판 하나를 나눠 쓰기로 하면서 적지 않은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칼국수집이 제법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으나 이씨에게 새 간판은 여전히 낭비처럼 느껴진다. “장사에 큰 욕심이 없다. 이제 나이가 들어 언제까지 할지도 모르는데…” 이씨는 15년 동안 점포의 얼굴이 되어 준 낡은 반쪽 간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벌이가 시원찮은 영세 업체들이 좁은 공간을 쪼개고 또 쪼개 쓰다 보면 간판까지 공유하는 경우가 흔하다. 10일 철공소가 밀집한 서울 을지로 3가 골목, 비좁은 출입구 위에 3등분 된 간판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상호를 붓으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수제 간판 옆으로 조그만 ‘영진금속’ 간판도 보인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입주 업체는 영진금속 한 곳뿐이다. 영진금속 대표 윤인식(50)씨는 “간판 속 철공소 세 곳 다 폐업했다”고 말했다. 영업도 시원찮은 데다 재개발을 앞두고 임대료마저 올라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 ‘우주선도 만든다’는 을지로 철공소 골목의 영광은 온데간데 없고 그 흔적만 간판에 남았다. 이미 사라진 업체들의 간판을 없애지 않은 이유를 묻자 윤씨는 “그냥… 원래 여기 있었으니까”라며 아쉬운 웃음을 지었다.
#2 재활용 수제 간판
“이 간판이 효자다. 멀리서도 이 간판 보고 손님이 찾아온다.” 1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뒷골목에서 만난 천귀태(66)씨가 트럭에 붙은 작은 조명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간판에 표시된 상호는 ‘칼 가위 AS’, 주로 강남 일대를 돌며 식칼과 가위를 가는 천씨는 10년 전 거리에 버려진 폐 간판의 부속을 주워다 이 간판을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조명장치가 내장된 작은 조각들을 글씨 모양으로 배치하고 전선을 이었다. 천씨는 “이동점포를 하다 보니 간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러나 많아야 하루 2만~3만원 벌던 시절에 몇 십 만원씩 주고 새 간판을 맞출 수가 없어서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다. 천씨의 표현대로 ‘나방을 부르는 불빛’이라는 작은 간판 덕분에 단골손님이 점점 늘었고 지금은 하루 최대 25만원까지 수입을 올린다.
업종과 관련된 물품을 간판 재료로 활용한 경우도 있다. 서울 이태원의 한 유제품 대리점에선 플라스틱 우유 상자가 간판으로 변신했다. ‘빙’ ‘그’ ‘레’ 세 글자가 적힌 널빤지를 각각 상자에 묶어 입체감을 주었다. 바로 옆 편집매장을 운영하는 남승민(40)씨가 이 간판을 만들어 선물했다. 대리점주 김성만(41)씨는 3년 전 점포 공간을 남씨와 공유하면서 기존에 있던 커다란 간판을 떼어 냈고 남씨는 우유상자 간판으로 배려에 보답했다. 우유상자를 제작한 남씨는 자신의 점포 간판은 분필로 적었다. 잘 지워지고 눈에 띄지도 않지만 그는 “간판보다 판매하는 내용물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철학을 실천하는 중이다.
#3 가성비 살린 아이디어 간판
점포의 얼굴인 간판을 좀 더 크고 눈에 잘 띄게 만들어 달고 싶은 것은 자영업자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하지만 웬만한 간판의 제작비용이 100만원 선인데다 특별한 디자인이나 LED 조명을 적용할 경우 영세 자영업자들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든다.
이런 현실을 비웃듯 비용을 쏟아 붓는 대신 개성 넘치는 문구와 톡톡 튀는 아이디어 간판으로 승부를 보는 점포도 적지 않다. 서울 강동구 길동의 ‘고급 아바이 순대’는 상호를 뒤집은 ‘거꾸로 간판’을 10년 전 내걸었다. 상호는 거꾸로지만 전화번호는 똑바로다. 업주 김모(59)씨는 “손님들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다. 간판을 본 분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사진도 많이 찍어간다”고 말했다.
‘과일, 야채 싸게 파는 게 죄라면 우리는 사형’. 서울 방배동의 한 농산물 판매장은 번듯한 간판 대신 낡은 현수막을 걸고 있다. 벌써 4~5년 된 임시 간판의 글씨는 흐려졌고 군데군데 때도 묻었지만 손님을 끄는 효과만은 여느 세련된 간판 못지않다. 물건을 싸게 공급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농담 섞인 문구 하나로 간판제작 비용은 아끼고 매출은 키운 셈이다. 간판 문구를 기억하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업주에게 가끔 농담도 건넨다. “오, 아직 사형 안 당했네…”
3년째 간판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고 있는 오수연(28ㆍ인스타그램 계정 ‘ganpansalon’)씨는 “이름이 특이하고 예쁘고 재미있는 간판이 정말 많다” 면서 “간판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다양한 삶의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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