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킬로스 ‘오디세이아’ 개작
당시 유명한 패륜 이야기 이용해
아테네 시민들에 ‘정의’ 가르쳐
-오레스테스, 아버지 죽인 어머니 살해
‘눈에는 눈’ 식 정의는 야만적
“피의 복수보다 법의 집행을" 설파
그리스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58년 아테네에서 개회된 디오니소스 비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한다. 그는 다른 비극작가들과는 달리 일관된 이야기로 구성된 세 가지 비극작품과, 그 비극작품에 연결된 사튀로스 해학극으로 경쟁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비극작품을 ‘오레스테이아(Oresteia)’라 부른다. ‘오레스테이아’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하자면 ‘오레스테스를 위한 노래’다.
‘노래’는 인간이 즐거울 때 부른 흥겨운 가락일수도 있고, 슬플 때 중얼거리는 탄식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대상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에 공감하여 불쌍히 여기는 연민으로 가득 찬 탄원일 수도 있다. 오레스테이아는 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그 비극적인 주인공을 바라보는 아테네 시민들의 시선이 작품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관된 세 이야기 오레스테이아
오레스테이아는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 중 한 주제를 가지고 세편의 비극으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이다. 아이스킬로스 뒤를 잇는 두 명의 다른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도 세편으로 구성된 비극작품들을 무대에 올렸으나, 그 작품들이 하나의 주제와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레스테이아를 구성하고 있는 세편 모두 지난 2,500년 동안 생존하여 오늘날까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다.
인류문화에는 가장 위대하게 꽃을 피운 몇몇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이나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겨진 숭고한 정신의 발현이다. 우리는 이 숭고한 정신을 ‘천재성’이라고 부른다. 오레스테이아는 단테의 ‘신곡’, 미켈란젤로의 ‘시스틴성당 프레스코’ 혹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 견줄만한 인간정신의 순수함과 숭고함의 감동스런 표현이다. 오레스테이아의 생존은 기적이며, 그 작품에 담겨 있는 사상은, 고대 아테네인에게 그렇듯이 오늘날 우리를 정신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이아의 주인공 오레스테스(Orestes)는 비극적 인간이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최악의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아다. 오레스테스의 행위만 보면, 그는 악의 화신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잠시 숨을 돌려 생각해보자. 왜 오레스테스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살해해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를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내몰았을까?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직접 오레스테스의 목을 조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폭력을 동원하여 개인적으로 복수해하는 것이 정의 아닙니까?” 혹은 “우리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아 숙고(熟考)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습니까?” “복수보다는 이해와 용서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까?”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기반으로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가로 2.15m, 세로 55cm 현무암에 서문, 282개 법조항, 그리고 결문으로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함무라비는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를 하나로 묶는 질서를 제정하였다. 그는 ‘정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카드어로 정의는 ‘미샤룸(misharum)’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규격’이다. 자신이 정한 원칙이 ‘정의’다. 함무라비법전 법 조항은 항상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경우, 그 가해자에게 어떻게 하라”는 형식으로 쓰여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상했을 경우 바빌론 법정은 그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만들었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치아를 부러뜨렸을 경우 그 가해자의 치아를 부러뜨렸다.
잔혹한 함무라비 법전을 뛰어넘어라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좋은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기초한 ‘불의’였다. 바빌로니아는 다른 고대왕조가 그러하듯이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바빌론 사회의 상위 5%를 차지하는 왕과 귀족들은 아카드어로 ‘아윌룸(awilum)’, 즉 ‘자유인’이라 불렸다. 지주였던 이들은 땅이나 돈을 빌려주는 부동산업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당이익을 취했다. 65% 정도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족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으로 ‘무슈케눔(mushkenum)’이라 불렸다. 이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품 가운데 70%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유인으로부터 돈을 빌리면 터무니 없는 이자로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더 불행해졌다. 바빌로니아 사회의 나머지 30%는 노예다. 아카드어로 ‘와드둠(wardum)’이라 불렸다. 이들은 한때 소작농 신분이었다가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혹은 바빌로니아가 주변 국가와의 정복 전쟁을 통해 잡아온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가 됐다.
함무라비 법전의 기본 틀인 동태복수법은 같은 계층 간에 적용되는 법이다. 다른 계층들 간에 사건이 발생하면 불평등 법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의 한쪽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경우 귀족은 노예에게 돈을 주면 해결되었지만, 만일 반대로 노예가 귀족의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경우 그 노예는 사형을 당했다. 왕정체제의 법이란 왕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의란,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는 것
고대 그리스에는 ‘정의’에 해당하는 ‘디케(dike)’라는 단어가 있다. ‘디케’는 ‘적당한 것, 맞는 것, 옳은 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에서부터 법정에서 법을 구형하는 구체적인 의미까지 포함한다. 혹은 더 넓은 의미로 ‘질서’ 혹은 ‘균형’을 뜻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 ‘디케’는 우주를 지탱하는 원칙이었다. 이들의 ‘정의’는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나 고대 인도의 ‘르타’처럼, 밤하늘에 솟은 수천 개의 별들이 운행하는 방식이자, 사시사철의 자연스런 변화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질서와 균형을 통해 자연 속에서 구현되었다.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는 “태양은 자신이 가는 길을 이탈하지 않는다. 만일 이탈한다면, 복수의 여신들이 그를 쫓아낼 것이다”라고 말한다. 디케는 균형의 화신이며 천체의 규칙적 움직임의 원리다. 디케는 질서의 상징이지만, 무질서를 야기하는 세력에겐 ‘복수’로 등장한다.
오디세이아를 개작한 오레스테이아
오레스테이아는 세편의 비극으로 구성되었다. 첫 비극작품은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이름을 딴 ‘아가멤논’, 두 번째 비극작품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세 번째 비극작품은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앞의 두 작품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며, 세 번째 작품은 질서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스킬로스는 왕정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를 실험하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모든 알고 있는 신화를 선택하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귀향과 비극적인 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그는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개작하였다. ‘오디세이아’ 11장에서 아가멤논은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니라,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투스에 의해 살해된다. 후대 판본에 의하면, 클리템네스트라가 아이기스투스를 도와 아가멤논을 죽인 후 자살한다. 아이기스투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보호하라고 남긴 심복이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아이기스투스를 7년 후에 살해한다. 오레스테스는 오디세우스의 순진한 아들인 텔레마코스가 따라야 할 멘토였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에서 무사히 돌아와 자신의 충성스럽고 사랑스런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와 재회한다. 오디세이아에는 오레스테스의 어머니 살해내용이 없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오래된 신화를 개작하여 아테네 사회의 기초인 ‘정의’를 정의한다. 그는 세편의 비극을 이용하여 아테네의 법과 정의에 관한 깊은 논의를 감동적인 드라마와 시로 무대에 올린다. 그는 폭력을 기초로 한, 피의 복수를 정의라 생각하는 사회는 야만적이라고 정의한다. 법정 토론을 통한 법의 집행이 정의다. 그는 아테네인이 모두 알고 있는 신화적이며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초로 ‘정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이 귀족들을 위한 특별학교인 ‘아카데미아’에서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정의를 논했다면, 아이스킬로스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던 충격적이며 끔찍한 이야기를 이용하여, 정의를 보통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적인 고양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어떤 이야기로 아테네인들에게 정의를 가르쳤을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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