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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월급 1인분, 일은 3인분… 직무관리 없는 한국은 ‘과로우울’

입력
2017.07.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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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기업들 ‘인력 쥐어짜기’

정확한 업무와 양 제시하지 않아

상사 투하하는 ‘일 폭탄’ 맞기 일쑤

일 잘하는 사람일수록 고생, 억울

한국의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원적 이유 중 하나는 마구잡이 식으로 부여되는 과도한 업무량이다. 직무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기술이 부재하기 때문에 적정 업무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노동자는 2~3인분의 일을 홀로 떠안아야 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한국의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원적 이유 중 하나는 마구잡이 식으로 부여되는 과도한 업무량이다. 직무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기술이 부재하기 때문에 적정 업무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노동자는 2~3인분의 일을 홀로 떠안아야 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적정 업무량이요? 그런 게 어딨습니까. 인사와 퇴사로 결원이 생겨도 ‘엔빵’(n분의 1로 나눠 업무 막기)이 기본이고, 충원 없이 일하다 보면 그게 그대로 정원이 되는 구조인데요.”

국내 한 상장사에서 5년째 주식담당자(IR)로 일하고 있는 윤지훈(가명ㆍ32)씨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여러 차례 상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있다. 야심하도록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게 너무 싫어 업무시간에는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아 가며 일부터 끝내고 보는 윤씨는 사내에서도 손이 빠르다는 칭찬을 받을 만큼 업무 효율이 높다. 하지만 업무량은 가히 살인적이다. 기획본부 소속으로 일하다 보니 기획팀 등 옆 팀의 업무가 자주 넘어오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영어능통자라는 이유로 영어와 관련된 업무는 대부분 윤씨의 몫이다. 그렇다고 투자자들을 위한 자사 주식 분석이라는 본업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도저히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에요. 2인분, 3인분이 기본이죠. ‘사람을 더 뽑아달라’ 여러 번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늘 똑같아요. ‘상황은 이해하지만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거죠.” 윤씨의 회사는 3년 전에 비해 고객 미팅이 2~3배 늘었을 정도로 잘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윤씨 혼자서 미팅 업무를 진행하는 건 똑같다. 성과를 낼수록 업무는 늘고, 회사는 성장하는데 직원은 고통스럽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만성적 과로우울에 시달리는 이유다.

‘최소 인력으로 최대 성과를’

대한민국이 노동시간 최장국가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직무관리의 부재다. ‘채용-교육-배치-업무 할당-성과 관리’의 인사 전 과정에서 노동자가 해야 할 정확한 업무와 업무량이 제시되지 못한 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식의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한 직무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명확한 업무 분석과 기술에 기반해 채용과 업무 할당, 성과 관리, 보상까지 이어지는 직무중심 인사관리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연공서열에 의한 사람중심 인사관리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직원들은 상사가 투하하는 ‘일 폭탄’을 고스란히 받아 안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 인사팀에서 수년간 근무한 A씨는 “외국계 한국지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적정 업무량을 산출할 만큼 직무분석이 안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외국 기업들이 '추가근무를 시키지 않기 위해' 직무분석을 하는 것과 달리 한국 기업은 인당 생산성 최대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게 근원적 차이”라고 말했다. “개인별 업무분장과 업무범위가 설정돼 있어야 소요시간도 정확히 예측되는데, 한국 기업들은 일단 주어진 인력에 최대한 많은 업무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원칙이라곤 최소의 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낸다는 것뿐이다.

직무관리의 부재는 일을 빨리 끝내면 또 다른 업무를 재빨리 할당하는 방식으로 유능한 직원의 효율을 잠식한다. 윤지훈씨는 “일 잘하는 사람일수록 고생하고 억울한 구조”라며 “이제는 다 해놓은 일도 감춰뒀다 데드라인에 맞춰 보고하는 경지에 올랐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2년 전 윤씨의 팀에 두 명의 결원이 생겼을 때 팀장과 팀원 모두 죽을 동 살 동 일한 결과 인원이 전혀 보강되지 않았다. 충원하려던 당초 계획이 ‘팀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물거품이 돼버렸다. 반면 성과가 나지 않고 간간이 사고까지 터졌던 옆 팀에는 즉각 인력이 보충됐다. 한 편의 부조리극 같았다.

도저히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과중한 업무를 맡겨놓고 말로는 정시퇴근을 격려해봤자 소용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도저히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과중한 업무를 맡겨놓고 말로는 정시퇴근을 격려해봤자 소용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능력 평가할 땐 ‘야근이 최고지’

‘칼퇴근’과 ‘철밥통’의 아이콘으로 불리지만, 공무원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일선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 업무를 담당하는 3년차 공무원 고나리(가명ㆍ27)씨는 처음 입사해 사무실 곳곳에 스탠드가 놓여 있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가족의 날’인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15분 청사가 강제소등에 들어가면, 어두운 사무실에서 컴퓨터만 켠 채 남은 업무를 하기 위한 용도의 스탠드였다. ‘스탠드 야근’이 문제가 되자, 요즘은 오후 6시 30분~7시면 불을 다시 켜준다.

“일주일에 사나흘이 야근이에요. 밤 9~10시까지 야근하는 게 다반사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셈이죠.” 주당 60시간에 육박하는 고씨의 장시간 노동 역시 과중한 업무량이 원인이다. 공공부문이라고 직무관리가 잘 되고 있을 리 없어 고씨의 업무는 지자체 예산업무부터 기초생활수급자 주거급여, 각 사무실의 회계, 현안 보고서 작성, SNS 인증샷을 통한 출장 복명까지 다종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연관성 없는 업무가 너무 많아요. 업무들이 연계돼 있어야 그나마 효율적인데 마구 투척되는 전혀 다른 단위업무들을 하다 보니 더 힘든 거죠.”

야근을 성실함, 능력의 척도 삼아

비효율적 회의, 과도한 보고 탓

직장인 43% “주 3일 이상 야근”

스웨덴은 ‘무능의 상징’ 간주

하나의 직무단위로 분류하기 어려운 다양한 역할과 책임을 노동자 1인에게 부여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가 앓고 있는 질병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5년 펴낸 논문 ‘임금직무 체계 변화실태와 직무급의 과제’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적 관행은 사람에 직무를 맞추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개인적인 능력이 높은 직원에게는 추가적인 업무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한 명 뽑으면 여기저기 돌려쓰고, 포괄적으로 돌려쓰니 직무평가가 어렵다. 일이 많으니 야근이 불가피하고, 누구나 야근을 하니 나도 야근을 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 야근이 성실과 능력의 척도가 되는 기업문화가 이렇게 유지된다.

경영컨설팅 기업 맥킨지가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 의뢰로 작성한 ‘한국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국내 100개 기업의 직원 총 4만951명 중 43%가 주 3일 이상의 야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근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비효율적 회의(61%)와 과도한 보고(59%), 불명확하거나 일방적인 업무지시(45%)로 조사됐다. 대리급 직원 45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조사에서는 회사에서 보내는 총 10시간58분 중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시간은 5시간 32분에 불과했다. 뚜렷하게 할 일이 없음에도 조사기간 중 매일 남아 야근을 한 사람들은 업무시간 생산성이 45%로 평균 58%에 비해 훨씬 낮았다. “야근이 조직에 추가적인 가치를 전혀 창출하지 못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야근의 역설”이었다.

“야근은 무능의 상징”… CEO 결단이 중요

H&M 본사에서 사용자 경험(UX)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는 양효진(36)씨는 스웨덴에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2015년 4월 H&M에 입사했다. 한국에서는 대학연구소와 민간기업 등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관련한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업무를 담당했었다. 상사가 퇴근해야 컴퓨터를 끌 수 있었던 한국에서와 달리 스웨덴에서는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 하루 8시간만 근무한다.

“서류상으로는 한국과 근무시간이 똑같죠. 다른 점은 스웨덴에서는 가급적 야근을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근로계약서를 쓰는데 근무시간을 넘겨서는 일을 하지 말라는 권유사항이 적혀 있더라고요.”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게 스웨덴의 직장문화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H&M 본사에서 일하고 있는 양효진씨는 “업무를 몰아주지 않고 잘게 쪼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게 스웨덴과 한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 같다”고 말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스웨덴 H&M 본사에서 일하고 있는 양효진씨는 “업무를 몰아주지 않고 잘게 쪼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게 스웨덴과 한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 같다”고 말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그가 오후 5시 반이면 퇴근할 수 있는 이유는 회사와 하기로 계약한 일만 하는 덕분. “한국에서는 웹디자이너에게 포스터 디자인, 브로셔 디자인 등 정해진 업무 외의 일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사람이 닳거나 말거나 소모품으로 보는 거죠. 하지만 여기는 일자리가 잘게 쪼개져 있어요. 명확히 기술된 직무를 보고 지원해 그 능력만으로도 채용 여부가 결정되고, 입사 후에도 그 일만 잘하면 되는 거죠.”

한국도 변화의 바람 불어

SK 이노베이션, 정시 퇴근 위해

강제소등, PC 추적 접속 실시

“CEO의 결단이 가장 중요” 강조

양씨는 입사 초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옆자리에 앉은 스웨덴 사람으로부터 ‘어디 아프냐? 도와줄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버스 안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는 걸 보고 뒤늦게 깜짝 놀랐다. “그 후 유심히 살펴보니 스웨덴에선 아침에 버스나 지하철에서 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야근과 회식에 시달리며 거의 전원이 졸던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었죠.”

야근과 회식을 '증오'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기업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다. 효율적 직무관리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야근과 회식을 '증오'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기업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다. 효율적 직무관리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억만금도 싫다, 시간을 다오’ 외치는 밀레니얼 세대가 대거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면서 ‘인건비 뽑아먹기’식 경영의 한계를 절감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2012년 가족친화우수기업 대통령표창을 받은 SK이노베이션의 한 부장급 인사는 “CEO의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며 “위에서 강하게 밀어붙여야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정시퇴근 문화의 조기정착을 위해 SK이노베이션은 당시 CEO 주도 하에 오후 6시 강제소등, 소등 후 사내 PC 접속 이력 추적, 적발 시 팀장 경고, 연차 100% 소진 실패시 본부장 보너스 삭감 등 강제 조치를 시행했다. 회식도 1차만 밤 9시 이전에 종료토록 했다. 5년 여가 지난 현재는 ‘야근은 무능력의 척도’라는 인식이 조직문화로 자리잡았고, 회사는 지난 2년간 사상 최대 실적을 갱신했다.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주고 강하게 실행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역행은 절대로 불가능하죠. 대기업이 바뀌어야 중소기업도 바뀌고, 기업 전반에 문화가 확산되지 않겠습니까.”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사람중심 인사관리의 유연성과 재량권은 고도성장기에는 효과적이지만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시스템”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명확한 직무분석과 관리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포괄적으로 업무를 부여하고 포괄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던 비과학적 방식은 한국의 최장 노동시간을 지탱해온 두 축이다. 이제 이 축에 균열이 가고 있고, 더 많은 균열이 가야 한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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