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킬로스는 참전용사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마라톤 평원에서 싸웠다. 페르시아 군대는 식민지에게 강제로 징집되거나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들이었으나,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재산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창과 방패를 마련하여, 자발적으로 마라톤 전쟁에 참전하였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켜, 아테네를 약탈하고 아크로폴리스 신전들을 파괴하였다.
아이스킬로스는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해전에 참전하여,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감격스럽게 목격하였다. 그는 이 승리를 폭력에 대항하는 정의의 승리, 공포와 비겁에 대항하는 용기의 승리, 왕정체계와 노예제도에 대항하는 민주질서와 자유의 승리라고 보았다. 특히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오만에 대한 아테네의 겸손과 중용의 승리였다.
아테네의 힘, 파르테논과 오레스테이아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당장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정의, 용기, 자유, 그리고 중용과 같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발견하였다. 이 에너지는 기원전 5세기 두 개의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한다. 하나는 페리클레스의 주도 아래, 건축가 익티노스와 조각가 페리디아스가 건립한 파르테논 신전이다. 다른 하나는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집필하여 아테네 비극 공연 무대에 올린 3부작 ‘오레스테이아’다.
이 두 개의 문화유산은 서양문명의 상징이자 힘이 되어, 서구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두 유산의 성격과 차이는 분명하다. 파르테논 신전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건축되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여 감탄을 저절로 자아낸다. 그러나 ‘오레스테이아’는 조그만 충격에도 사라질 파피루스에 잉크로 기록되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오레스테이아’ 대본을 읽고 이해할 사람은 아이스킬로스 밖에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산은 ‘오레스테이아’다. 파르테논 신전은 ‘오레스테이아’가 담고 있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문명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 정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가는 곳마다 제2, 제3의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였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오레스테이아’ 연극을 개작하여 실존주의 철학을 대중에게 표현하였고, 현대무용의 선구자인 마사 그레이엄은 ‘클리템네스트라’라는 작품에서 인간내면의 욕망과 폭력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오레스테이아’의 첫 작품 ‘아가멤논’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부인이다.
급진 민주주의자 에피알데스 암살당하다
아이스킬로스는 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까? 그는 아테네 정치 혁신가 에피알테스가 제안한 급진 민주주의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정의(正義)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정의가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인 평등, 자유, 중용, 그리고 희생을 구현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462년, 아테네 정치가인 에피알테스는 사법개혁 없이 민주사회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에피알테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평가한다. “그는 생각이 깊고 매수가 불가능하다.” 에피알테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인 민주주의를 깊이 숙고하였고, 자신의 소중한 생각이 우주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매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당시 귀족들이 자신의 권력을, 법을 통해 실현하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위치한 아레오파고스(고대 아테네의 정치기구)의 권한을 축소한다. 이곳에선 신성모독, 살인, 방화가 같은 중범죄만을 다뤘다. 에피알테스는 30세 이상 아테네 시민 가운데 무작위로 6,000명을 선출하여 ‘엘리아이아’라는 민회를 만들었다. 아테네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건들은 이 민회를 통해 해결하였다. 이 급진적인 변화를 주동한 에피알테스는 아테네 귀족들에 의해 그 다음 해인 461년에 암살당한다.
민주정의 뿌리는 무엇인가, 오레스테이아의 질문
아테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진적인 변화를 그대로 담은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이아’다. ‘오레스테이아’는 귀족들이 아레오파고스에서 오랫동안 누렸던 권력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아가멤논이 살해된 피로 물든 욕조처럼 적나라하게 그렸다. 아레오파고스의 정의는 귀족들이 오랫동안 고수한 ‘복수’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아이스킬로스는 ‘복수’라는 정의가 이제 아테네에서 민회라는 새로운 체계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변화에선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다. 이 변화는 진행되어야 한다. 패자는 소수이며 승자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비극작품을 통해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의 삶과 민주사회를 구축하는 정신적인 뿌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신화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인 상황을 참신하게 볼 수 있는 창문을 만들었다. 신화는 오늘의 문제를 우주적으로, 객관적으로, 심미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라는 책에서 신화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도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명명한다. ‘브리콜라주’는 짧게 풀이하면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 혹은 ‘수리’라는 의미다. 아이스킬로스는 신화적인 이야기를 재현한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5세기 아테네 정치문제를 숙고하는 ‘브리콜라주’를 시도한다.
‘오레스테이아’는 과거에 묶인 복수가 아니라 미래에 등장할 정의라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의 전쟁과 불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조화가 꽃을 피운다. 아테네인들은 왕정시대의 야만적 질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들이 고대하던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동체, 자비로운 신들과 사람들로 구성된 아테네를 꿈꾸고 있었다. ‘오레스테이아’는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열망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경고하기도 하고 독려하기도 한다.
정의란 이름의 폭력은 야만이다
기원전 458년 아이스킬로스가 67세가 되었을 때, ‘오레스테이아’를 무대에 올렸다. ‘오레스테이아’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빛과 희망을 선물하였다. 빛과 희망은 어둠과 절망의 자식들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서 내려오는 미케네 수도 아그로스를 둘러싼 저주와 범죄로 시작한다. 이 시작에는 새벽의 서광이 비치기전 가장 어두운 밤처럼,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야만이 숨겨져 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야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만 문명사회를 진입할 수 있다. 이 야만은 문지방을 거쳐, 아테네 도시를 승리의 횃불로 밝히는 시민적 신뢰와 정의로 만들어진 문명으로 대치된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기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으로 구성되었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작품들을 ‘호메로스의 잔치에서 가져온 빵 조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주제선택과 개작은 호메로스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때때로 원전보다 복사본이 창의적일 때도 있다.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신화를 통해 전쟁에서 평화로 나가는 인간의 진보를 감지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야만의 극치를 ‘오디세이아’에서 찾았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그녀는 자신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가족이야기다. 그는 호메로스 이야기를 더 신화적이며 폭력적으로 각색하여 후에 등장할 아테네 문화의 위대함과 대비시킨다.
올바른 정의란 무엇인가
‘오레스테이아’는 야만에서 시작하여 문명으로 가는 긴 행진이다. ‘오레스테이아’의 첫 작품 ‘아가멤논’은 복수로 시작한다. 자신이 당한 일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하는 행위, 복수가 정의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고향인 아르고스로 돌아온다. 아내 클리템네스트라는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아가멤논이 10년 전 1,000척의 함선을 이끌고 트로이 전쟁을 향해 떠나던 날, 바다의 폭풍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쳤다. 제물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효력이 있다. 아가멤논은 클리템네스트라와 사이에 난 딸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의 혈육을 살해한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로 복수하는 것이 정의라 여겼다. 클리템네스트라의 행위는 불의한가 아니면 정의로운가? 독일 철학자 니체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의롭기도 하고 불의하기도 해, 둘 다 정당하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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