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은데 ‘헌정’이라니 원로 대접 받는 것 같아 어색합니다. 저를 비롯해 허진호, 김지운, 봉준호 등 우리 세대 감독들이 60~70대까지 현역으로 열심히 활동해서, 앞으로 50대 중반 나이에 ‘헌정 당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멀티플렉스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박찬욱관’ 개관식을 앞두고 만난 박찬욱 감독(54)은 멋쩍은 웃음으로 감격스러운 날을 맞이한 소감을 대신했다. ‘박찬욱관’은 멀티플렉스 체인 CGV의 다양성영화 전문 브랜드인 CGV아트하우스가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인 박 감독에게 헌정한 예술ㆍ독립영화 전용 상영관이다. 부산 CGV 서면의 ‘임권택관’과 서울 CGV 압구정의 ‘안성기관’에 이어 세 번째다.
박 감독이 고심 끝에 헌정관을 받아들인 건 “시설 면에서 표준이 되는 상영관”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락한 좌석부터 이미지와 사운드까지 최상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감독과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영화를 온전하게 보고 싶을 때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무엇보다 관객을 위한 공간이라 무척 기쁩니다.”
‘박찬욱관’ 개관을 기념해 박 감독의 대표작 8편과 박 감독이 아끼는 추천작 7편이 상영되는 특별전이 다음달 23일까지 열린다. 박 감독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직접 꾸려볼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박찬욱관’을 찾는 관객 1명당 200원씩 적립되고 이 기금은 박 감독의 이름으로 독립영화 후원에 쓰인다.
박 감독은 2004년 ‘올드보이’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영화 대가다. 지난해엔 ‘아가씨’를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보냈고, 올해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영화계에선 ‘깐느박’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나날이 관객의 기대치가 높아져 중압감을 느낄 것 같지만 그는 “별로 그렇진 않다”고 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떠올렸다. “저에겐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영화인데, 관객들에겐 ‘시원찮다’는 평가를 받았죠. 선입견 탓인지, 아니면 제 전달 능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제 시간도 좀 흘렀으니 다르게 봐 주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또 하나 그가 아쉬워하는 건 ‘유머’다. “웃기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지 않는다”며 “나름 노력도 하고 꽤 잘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별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관객들이 다소 웃음에 인색한 건 그의 영화에 담긴 ‘폭력의 미학’ 때문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세간의 오해”라고 했다. 과거 ‘올드보이’가 영국 수입사에 의해 ‘아시안 익스트림’이란 수식이 붙여져 해외에 소개됐고, 그 수식이 널리 퍼지면서 이미지가 편협하게 굳어진 것 같다는 얘기다. “극단적 폭력과 잔인한 묘사, 장도리 같은 인상만으로만 제 영화를 볼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 싶어요. 제 영화 대부분이 결국엔 따뜻한 인간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저도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고요.”
그러고 보니 박 감독의 사랑 이야기는 지난해 엄청난 팬덤을 낳기도 했다.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킨 ‘아가씨’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각각 111번, 77번 관람한 관객도 있었다. 팬들의 요구로 블루레이와 OST 음반, 각본집, 사진집은 물론 LP까지 제작됐고, 조만간 제작 과정을 다룬 메이킹북도 출간된다. 박 감독은 “처음 경험하는 팬덤에 무척 신기했고 감동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를 보며 오히려 어려웠던 시절을 되새겼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써놓고도 투자나 캐스팅이 안 돼 몇 년이고 영화를 못 만들던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어요. 심지어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던 때도 있었죠. 지금은 책과 음반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영화 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는 미쟝센단편영화제에 각별한 애정을 쏟기로 유명하다. 복합영상문화공간인 서울시네마테크 건립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모두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한 일이다. ‘헌정관’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찬욱이라는 이름은 한국영화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어떻게든 이름이 남기만 해도 좋겠네요(웃음). 기왕이면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은 영화인’으로,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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